My Lord/† 聖人들의 삶을 통해서

성 파트리치오 (3월 17일) 주교, 선교사

ohjulia 2006. 3. 17. 06:39
고향으로 , 성 파트리치오
 

    성 파트리치오(St. Patrick) 주교, 선교사

    성인의 활동지역 : 아일랜드(Ireland) 성인의 활동연도 : 389-461년 성인과 같은이름 : 바드리시오, 빠뜨리시오, 빠뜨리시우스, 빠뜨리치오, 빠뜨리치우스, 파트리치우스, 파트리키오, 파트리키우스, 패트릭 로마제국의 브리튼 식민지의 관리인 칼푸르니우스(Calpurnius)의 아들인 성 파트리키우스 (Patricius, 또는 파트리치오)는 아마도 반나벰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난 듯한데, 이곳은 프랑스 지방이 아니면 스코틀랜드의 덤바턴(Dumbarton) 교외의 킬패트릭(Kilpatrick)인 듯하다. 그는 16세 때에 해적들의 포로가 되어 아일랜드의 어느 이교도에게 노예로 팔렸다가 6년 후에 도망하여 프랑스 지방으로 갔다. 그리고 22세경에 그는 브리튼으로 다시 돌아갔는데, 이번에는 레린스의 수도원에서 공부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 같다. 그 후 그는 15년 동안 오세르(Auxerre)에서 지내다가 417년에 사제로 서품되었고, 432년경에는 성 게르마누스(Germanus)에 의하여 주교로 축성되어 아일랜드로 파견되었고 성 바울리누스(Paulinus)를 계승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교에 대하여 적개심을 품은 수많은 원주민 추장 등과 과감하게 만났고, 대개는 기적적인 방법으로 회개시킴으로써 섬 전체에 그리스도교를 뿌리 깊게 심었다. 그는 442년과 444년에 로마(Rome)를 방문하였고 아마(Armagh) 대성당을 세워 아일랜드 교회 활동의 본거지로 삼았다. 아일랜드에서 보낸 30년간의 활동에서 그는 학문의 기풍을 진작시키고, 라틴어 공부를 비롯하여 아일랜드를 서방교회와 아주 가깝게 만든 공로자가 되었다. 그는 “고백론”을 썼는데 이것은 일종의 호교론이다. 성 파트리키우스의 문장은 뱀과 토끼풀이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성 파트리치오는 오곤네르와 같이 아일랜드 사람들에게 뛰어난 영웅으로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실제로 19세기에 오곤네르가 정치계에 남겨 놓은 것과 같은 공적을 파트리치오는 5세기에 종교계에 남겨 놓은 인물이다. 그는 385년 스코틀랜드의 기르바그에서 태어났다. 그의 소년 시절에는 별 다른 일이 없었지만 그 자신이 서술한 참회록이라 지은 자서전 속에서 당시의 자신은 거의 하느님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은 죄인이었다고 자책(自責)하고 있다. 16세 때 아일랜드의 해적이 스코틀랜드에 침입해 그는 그들의 포로가 되어 불쌍하게도 노예로 팔려갔다. 그러나 이 같은 재앙이 전혀 그에게 이익이 안 되었다고는 볼 수 없었다. 그 이유는 파트리치오가 목동으로서 가축을 지키는 한편 하느님께 대해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노예 생활하기를 6년, 22세의 청년이 된 파트리치오는 결단심을 가지고 탈주에 성공해 무사히 고향의 집으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 아일랜드에서 고생하는 동안 친히 목격한 외교인들의 가련한 영혼의 상태는 오랫동안 그의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그것이 원인이 되어 장차 사제가 되어 복음을 전하며 그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 노력하려는 결심을 갖기에 이르렀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자신의 결심을 관철시키기 위해 프랑스 레닌 수도원에 들어가 옥세르에서 신학을 배우고 귀국 후 사제가 되었다한다. 그는 친척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교를 목적으로 아일랜드레 건너가려고 하던 차. 때마침 아일랜드의 주교 바라디오가 서거했으므로 그는 주교직에 올라 보좌 신부 약간명과 함께 고국을 출발했다. 그 당시의 아일랜드에는 소수의 그리스도교 신자만 있었을 뿐 주민의 대부분은 우상숭배의 미신에 젖어 도루이도(이교 제사장)라는 자의 지도를 따르는 형편이었다. 정치적으로는 각지에 추장(酋長)들이 있어 각자의 토지를 다스렸고, 전체를 통할하기 위해서는 다라라는 곳에 왕이 있었다. 파트리치오는 보좌 신부들과 같이 아일랜드에 도착했으나 토민들에게 해적으로 오인 (誤認)받아 돌로 쳐죽임을 당하게 될 찰나에 피신해 전에 노예 생활을 하고 있던 북부지방에 가서 복음을 전하여 그 곳 추장을 개종시켰다. 그 후 파트리치오는 남쪽으로 가서 라오게르 왕을 축하하기 위해 도루이도나 추장들과 한자리에 앉아 있을 때 그 앞에 나와서 참된 종교를 설명하니 왕과 장관들과 상류 부인들이 개종하여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또한 도루이도인 트부도라는 자도 교회의 진리를 깨닫고 그의 시재(詩才)로써 복음 보급에 힘껏 노력했다고 전해 내려온다. 풍부한 하느님의 은총의 도움으로 대단한 성공을 거둔 파트리치오는 더욱 동분서주하며 불요불굴의 활동을 계속해 사람들을 가르쳐 인도하고 성당, 수도원을 세우고 사제를 양성하여 마침내 아일랜드 전국을 가톨릭국으로 만들 수가 있었다. 따라서 전 국민은 그를 자비로운 아버지와 같이 생각하며 누구하나 그에게 순종치 않는 이는 없었다. 그가 어려운 교리를 쉽게 설명하는데 얼마나 교묘했던가는 다음의 일례로 알 수 있다. 어느 날 그가 삼위일체의 오묘한 도리를 설명하고 있었는데 원체 오묘한만큼 누구나 좀처럼 이해하기가 곤란했다. 그때 파트리치오는 생각한 끝에 곁에 있던 클로버(Clover) 한 포기를 손에 들고 “보는 바와 같이 이것은 하나의 클로버이지만 끝은 세잎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도 한 분이시지만 그의 위(位)는 셋으로 되어 있다”라고 설명했다. 청중은 이런 적절한 비유에 비로소 삼위일체의 개념을 확실히 파악할 수가 있었다. 지금도 아일랜드에서 성 파트리치오 축일에 신자들이 클로버를 가슴 또는 모자 등에 붙이는 습관이 있는데 이것은 이 일화(逸話)에 기인한 것이다. 파트리치오는 아일랜드의 포교 사목에 큰 성공을 얻은 것처럼 그동안 남 모르는 역경과 고통을 당한 적도 적지 않았다. 그 하나는 그가 부활 축일에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고 있었는데 전부터 신자였던 그 지방의 추장 고로틱이 무슨 영문인지 신자들을 습격해 죽이거나 혹은 노예로 삼은 사건이었다. 파트리치오는 그의 난폭함을 슬퍼하며 즉각 서간을 보내 그의 그릇됨을 타이르며 즉시 포로로 잡아간 형제들을 석방하라고 명했지만 추장은 완강히 거절했으므로 평화를 사랑하는 주교께서도 눈물을 머금고 그를 파문에 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파트리치오는 각지를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면서 기도하고 덕을 닦는데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밤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제1부분에는 다윗 성왕의 시편 백편을, 제2부분에는 시편 나머지 50편과 기도를 올리고, 제3부분에는 수면으로 돌을 베개 삼아 쉬었다고 한다. 이같이 일생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봉헌한 파트리치오는 많은 공로를 쌓고, 464년 80세로 세상을 떠났다. (대구대교구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