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우리 나라 국민들은 커다란 부끄러움에 휩싸여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우리 나라의 정신적 스승이신 추기경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는 뉴스를
접하고 보니, 그 부끄러움은 이제 제 가슴을 찢는 아픔으로 다가옵니다.
그분이 계시기에 카톨릭 신앙이 자랑스러웠던 적이 많았는데, 그분은 우리 카톨릭 신자들의
영적 스승이기도 하신데, 그분의 눈에서 조차 눈물을 흐르게한 이 사태가 마치 제가 만든 일처럼
부끄럽게 생각되는군요.
이번 사건의 원인은 조그마한 성취를 침소봉대하고, 미완성의 결과를 조급하게 드러내고
자랑하고픈 헛된 욕망입니다. 10 년여를 걸쳐 이룩해야 될 업적을 한방에 이룩하려한 무모함입니다.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는다는 속담이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껴집니다.
아니 어떻게 온 인류를 향해 거짓말을 할 수 있는가요? 왜 한국인은 세계 무대 안에서
부정직하다는 눈총을 받아야 하나요? 조그만 손바닥으로 제 눈만 가리면 아무도 자기를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속담 속 아이처럼 정말로, 진정으로 그가 그런 짓을 했답니까?
추기경님은 성탄 인터뷰 도중 말을 잇지 못하시고 두 번 씩이나 눈물을 보이셨습니다.
" 이번 사태는 특정인이나 단체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정직하지 못한 우리 사회 전체의 문제이다. "
"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우직한 자세입니다. "
" 이번 일을 계기로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부정직하게 살았는지, 진실을 외면하고 살았는지 되돌아 보자. "
" 하느님이 우리에게 천연자원이 풍부한 국토를 주지 않으신 대신 똑똑한 머리를 주셨다.
그런데 그 좋은 머리를 좋게 쓰지않고 남을 속이며 제 이익만 추구합니다."
" 정직과 진실을 되찾는 것만이 진정한 치유책이자, 수습책이 될 것입니다. "
추기경님은 이번 사태를 그저 한 개인의 잘못쯤으로 여기시지 않고 당신의 잘못인 양
자책의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성서에서 이와 비슷한 경우가 있습니다.
사무엘 하 24 장 내용은 그 당시 전염병으로 돌던 흑사병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습니다.
이에대해 다윗은 그 이유를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자신과 자신의 조상에 돌립니다.
22 장에서 다윗은 사울뿐 아니라 모든 원수의 손에서 건져 주신 날을 야훼께 찬양합니다.
23 장에서는 다윗의 마지막 말과 다윗의 장군들의 이름을 거명하며 그들의 논공을 기립니다.
다윗은 승리의 기쁨을 병적조사를 통해 누리려 합니다. 그런데 자기 부하인 요압 총사령관은
병적 조사에 반대합니다. 다윗은 요압의 직언에도 불구하고 병적조사를 실행합니다.
요압이 반대한 이유는 전쟁에 피폐해진 백성의 마음을 추스리고 부담을 줄여 주는 것이
더 하느님의 뜻에 알맞는 것이라는 충어입니다. 그 당시 병적조사는 사실상 인두세를 위한
조사였으며, 일 인 당 반 세겔씩 거두는 징세 행위였습니다.
출애굽기 30 장에서는 인구조사를 야훼께 바치는 백성들의 목숨 값으로 여겼습니다.
병적조사는 그러기에 아무 때나 행하는 것이 아니였습니다. 아마도 병적조사가 있은 후에
흑사병이 창궐했던 것 같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 다윗은 자신이 행한 행동이 잘못되어 하느님께서 책벌하시는 것으로
받아드렸습니다. 사무엘 하 24, 10 절에서 다윗은 " 제가 이런 못할 일을 해서 큰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참으로 어리석었습니다. 야훼여, 이 종의 죄를 용서 해 주십시오. " 라고 고백합니다.
또 다윗은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징벌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고 하느님께 맡겨 드립니다.
그리고 가드의 충고를 받아드려 그의 말대로 제단을 쌓아 야훼께 용서를 빕니다. 그러자 곧
야훼께서 이스라엘에서 재앙을 거두십니다. 다윗이 제단을 쌓아 제를 드린 곳에다 나중에
예루살렘 성전이 서게 됩니다.
미국 남북 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에 아브라함 링컨은 남북 전쟁을 단순히 정치적 충돌에 의한
전쟁이라 규정짓지 않습니다. 그는 역사의 눈으로 남북전쟁을 조망한 뒤에 하느님께서 역사하신
전쟁으로 선언했습니다. 인간이 더 이상 같은 인간을 노예로 삼아 사고 팔며 억압하기를 원하지
않으시는 하느님께서 일으키신 노예 해방 전쟁으로 여긴 것입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의 눈물이나, 다윗의 고백, 링컨의 역사 인식은 모두 하느님의 시각에서 전체를
바라 본다는 데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역사적 사실엔 만약이라는 가정법이 없습니다. 다만 그 역사를 어떻게 바라 보느냐는 역사관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각자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적 인생 역정을 어떤 눈으로
바라 보느냐는 인생관에 따라 큰 차이가 납니다.
하느님의 시각으로 인생 전체를 조망할 때 우리는 기쁨 속에서 인생을 살아 갈 수있는 것 아닐까요?
물론 지극히 어렵겠지만, 그래도 이 안에 길이 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 아닐까요?
주님 용서하소서, 우리의 어리석음이 하늘을 가렸나이다.
생명을 제 손에 두어 보자는 무모함이 화를 불렀나이다.
이는 우리 모두 미처 깨닫지 못하고 한 어리석은 인간에게 기대를 걸었던 죄이나이다.
헛된 미망에 빠져 서푼 짜리 영예를 추구한 우리의 부족함이나이다.
추기경님의 눈물이 갖는 진정한 의미를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음모라는둥 쇼라는둥....
아,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죗가이나이다.
부끄러워 얼굴을 파뭇고 통한의 눈물을 삼키며 이 글을 씁니다.
이름 조차 거명하기 부끄러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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