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서 저 어둔밤의 수동적 정화에다 영혼을 두시지 않으면 다른 불완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영혼은 이런 불완전을 말끔히 씻을 수가 없다. 한편 영혼은 제 나름대로, 정화와 완성을 위한 노력을 다해야만 하느님의 치료를 감히 바랄 수 있을 것이니, 영혼은 제 힘으로 못한 일체를 이로써 고칠 수 있을 것이다. 영혼이 제아무리 힘을써보았자 하느님께서 손을 벌리지 않으시고 저 어두운 불 속에서 영혼을 정화시키시지 않는 한, 영혼은 능동적으로 - 제 힘만으로는 - 완전한 사랑에 의한 하느님과의 합일을 조금도 마련하지 못하는 것이다. 밤 1권 3장, 3.
십자가의 성 요한은 믿음의 체험을 여러 단계로 구분한다. 영적 생활의 진보에 대해 전통적인 구분을 존중하여 정화의 길(via purgativa), 조명의 길(via illuminativa), 일치의 길(via unitiva)의 세 단계로 나눈다. 이와 같은 세가지의 길은 영성의 또 다른 구분에 대응하는 것이다. 즉 초심자(principiantes)는 정화의 길에, 진보자(progredientes)는 조명의 길에, 완성자(perfectos)는 일치의 길에 해당된다;
호안 가렡드, 『십자가의 성 요한의 영성』, 서울 가르멜 여자 수도원 역, 서울, 가톨릭출판사, 1994, p.87 참조.
그러나 뛰어난 영적 지도자들은 인간의 삶을 그렇게 기계적으로 분리하여 각 단계를 구분지으려 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체험한 것을 다른 사람도 이해할 수 있도록 단계와 길이라는 어휘로 표현하여 쉽게 알아 듣게 하려는 데서 그런 것이다. 그런데 평범한 인간인 우리들은 훌륭한 영혼들의 생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단계를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어리석음을 범하기도 한다. 같은책, p.88.
십자가의 성 요한의 네 가지 주요한 작품을 보면 <갈멜의 산길>에서는 첫째 단계 즉 ‘감각의 밤’을 취급하고 있는데 인간이 지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에 사로잡혀 있는 상대에서 자연을 넘어 신비에로 들어가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그 다음 저서 <어둔밤>에서 인간은 둘째 단계로 들어 간다. 즉 정신의 정화 상태, 하느님과의 일치에 이르기 전의 변용이다. 회심을 위한 준비가 기록되어 있다. <사랑의 산 불꽃>에는 하느님과의 일치, 사랑의 합일이 설명되어 있다.
그리고 네 번째 작품 <영혼의 노래>는 신비 신학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거기서는 신비의 온갖 단계, 즉 신비에 들어 가지 전 단계인 소위 초심자에서부터 신비의 마지막 단계인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모든 것이 총망라되어 있다. 같은책, p.89.
십자가의 성 요한은 자신의 영성적 가르침의 초점을 하느님과의 초자연적 합일에 맞추고 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또한 영혼의 정화의 양상에 따라 능동적 정화와 수동적 정화로 나눈다. 이는 십자가의 성 요한의 체험에 있어서 수덕과 하느님의 은총의 총체적인 이중적 국면이다. 즉, 하느님과의 합일에 이르기 위하여 믿음의 자세로 돌아오는 능동적 정화와 당신께로 초대하시고 이끄시는 초자연적 은총인 수동적 정화의 병행 구조이다. 하지만 이 두 부분은 도식적으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는 않다. 오히려 이 두 부분은 하느님께서 적절하다고 판단하시는 시기와 방법을 따라 서로 번갈아 나타난다. 능동적인 부분이 무엇보다 첫째 부분을 차지하고 수동적인 부분이 마지막 부분에서 더 우세하다는 것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가르멜수도회 편, 『십자가의 성 요한의 영성입문』, 서울, 크리스챤출판사, 1991, p.173.
여기서 능동적 정화들은 그 양상이 뚜렷히 나타나고 우리의 수덕적 노력에 의존하기에 자세히 살펴보고, 수동적 정화는 오직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므로 그 표징과 효과등을 간단히 살펴 보겠다. 이제 정화의 각 부분들을 살펴보자.
4.1. 감각의 정화
4.1.1. 감각의 능동적 정화 감각의 어두운 밤에 대한 설명은 「깔멜의 산길」 1권 1장에서 15장까지 서술되어 있다.
하느님을 알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을 아는 것이다. 잠언 300.
이 구체적 정화의 단계에 있어서 우리가 먼저 살펴 보아야 할 것은 십자가의 성 요한은 외부세계 즉, 감각세계 그 자체를 나쁘다거나 유해한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는 <영혼의 노래>에서 피조물에게는 감탄스러운 자연의 아름다움 뿐 아니라 육화 이전 하느님께서 자연계에 그의 눈길을 주셨기에 그 존재는 초자연성이 반영되어 후광마저 띠게 되었음을 일깨워 준다. 즉, 하느님께서는 당신 영광의 광채이시며 그분 본체의 얼굴이신 성자를 통하여 모든 피조물들을 창조하셨으며 그들 안에 당신 존재의 반사(反射)를 남겨놓은신 것이다. 그러므로 외계에 실재하는 것들은 그 자체로서는 좋은 것이다. 이와 같은 세상은 성화와 구원에 있어서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다. 다만 장애물이 되고 안되고는 이 세상의 모든 사물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반응을 나타내며 또 그것들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있다. “감정이 때때로 이성을 방해한다고 해서 감정이 영적 생활에 무용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리스도교의 정신은 금욕주의가 아니다. 십자가는 인간적 감정을 말살함으로써 우리를 성화(聖化)시키는 것이 아니다. 초연함은 무감각함이 아니다.... 우리에게 인간적인 감정이 없다면 하느님이 우리에게 원하셨던 방식으로, 즉 인간으로서 우리는 그분을 사랑할 수 없다. 우리가 인간적 감정에 응답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기를 원하셨던 방식, 즉 하느님이시자 하느님의 아들이며 기름 부음을 받은 구세주이신 인간 예수의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Thomas Merton, 『고독 속의 명상』, 장은명 역, 서울, 성바오로출판사, 1993, pp.20-21.
따라서 감각의 능동적 정화는 다분히 인간의 내밀성(內密性) intimite; 정신적 존재의 내면성을 표현하는 말로서 interiorite(내면성)이 좀 더 객관적이며 보편적인 뜻을 가지고 있는 반면, intimite란 말은 주관적이며 개별적인 뜻으로 사용된다. 즉, 내밀성이란 개인의 정신 안에 깊은 실존적 측면에서의 성향을 의미한다. 이는 다분히 인격적이며, 신앙에 있어서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이기도 하다; Louis Lavelle, 『성인들이 세계』, 최창성 역, 서울, 가톨릭출판사, 1992, p.28 참조.
에 관한 문제이며 하느님께 대한 정향의 촉구이다.
4.1.1.1. 첫단계
영혼은 피조물들로부터 물리적으로 이탈하지 못할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 피조물들에 대한 욕망과 맛으로부터 그 의지가 이탈하지 못한 경우에도 자신을 정화 시킬 수 없다.
물질적이고 지상적인 사물들의 맛으로부터 쉽게 이탈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성인은 우선 우리의 취미와 감각을 영적인 것들에로 집중시킬 것을 권한다. “그처럼 영혼들은 거룩한 일들 안에서 자신이 찾아낸 맛의 덕분으로 다른 모든 맛들을 쉽게 포기한다. 이는 마치 우리가 어린이들에게 하는 짓과 비슷한데, 우리가 어린이들에게서 무엇을 빼앗으려면 그 어린이들이 빈손으로 울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다른 무엇을 쥐어준다.” 산길 3권 39장, 1.
그러면 지금까지 즐기던 것보다 더 고상한 감각적인 그쁨이 있다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이고, 지상적인 만족을 찾느라고 보낸 시간들이 그에게는 낭비된 시간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가르멜수도회 편, 『십자가의 성 요한의 영성입문』, 서울, 크리스챤출판사, 1991, p.175.
“많은 성인들은 어찌 그리 완전하였으며, 관상적 생활을 하였을까! 이는 저들이 자기를 온전히 극복하여 모든 세속적 욕망을 없이하기로 힘쓴 까닭으로 온전한 마음 속으로 하느님께 정을 붙이고 자유롭게 자기를 지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나 우리의 사욕을 생각하고 너무나 사라질 일에 대하여 근심 걱정한다. 우리는 한 가지 악습이라도 완전히 이기기 드물고 날로 진보하기를 게을리하므로 항상 싸늘하고 냉랭하게 지낸다.” Thomas A Kempis,『준주성범』, 윤을수 역, 서울, 가톨릭출판사, 1990, 1권 11장, 2.
4.1.1.2. 진정하고 고유한 의미에서의 정화
불완전한 영혼들에게 있어서는 이 첫 단계의 결과가 이미 큰 성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첫 단계는 곧장 두 번째 단계로서 보다 결정적인 진보에로 넘어가야 한다. 즉 모든 분야에 있어서 감각적인 맛에 대한 ‘전적인 고행’ mortification; 즉 절제, 금욕 혹은 죽음.
에로 넘어가야 하고 이는 영적인 분야까지도 포함해야 한다. 감각의 능동적 정화가 시작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이다.
“우리가 완전히 절욕(節慾)하고 안으로부터 번잡함이 없다면 하느님의 사정에 맛들일 수도 있고 천상적 관상을 경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성 이냐시오(Ignatius)가 식별을 하기 위한 조건으로 말한 ‘불편심’의 상태와 비교해 볼 수 있다.
우리에게 제일 크고 홀로 하나인 장애거리는 사욕과 일락(逸樂)을 온전히 끊지 못함과 성인들이 가진 완덕의 길로 들어가고자 힘쓰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무슨 조그마한 역경을 당하여도 너무 급히 실망하며 세상의 위로를 찾으려 든다.” Thomas A Kempis, 같은책, 1권 11장, 3.
칼 라너에 의하면 포기신학이란 복음적 권고를 따르는 것을 말한다. 복음적 권고는 영성생활에서 볼 때 포기와 고행이다. 특히 이 포기는 크고 작은 희생을 통한 고행에 의하여 영적 정화의 교육을 함으로써 영성생활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부분이다. 정대식,『영성생활』, 서울, 크리스챤출판사, 1993, p.82.
포기는 또한 어디까지나 그리스도교 완덕을 지향하는 덕성스러운 하나의 행태이며, 사랑을 존재상의 최고 규범으로 삼는 행태이다. 따라서 포기의 최고 의미는 사랑에 의해서 규정되지 않으면 안된다. Karl Rahner, 『靈性神學論叢』, 정대식 역, 서울, 가톨릭출판사, 1992, p.158.
4.1.1.3. 정화의 구체적인 규범들
십자가의 성 요한은 다음과 같이 정화의 규범들을 제시한다. “고귀한 마음으로 관대하게 정화를 실천하게 된 사람들이라면 그 영혼은 감각의 밤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산길 1권 13장, 7-8.
ꂎ 예수께 대한 모방
ꂎ 감각들에 대한 정화
ꂎ 욕(欲)들에 대한 정화
ꂎ 자애심에 대한 정화
4.1.1.3.1. 예수 그리스도를 모방함
“우선 영혼이 그리스도를 모방하려는 항구한 원의를 가질 것이고.... 모든 행위를 함에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처럼 하기 위해서 그분의 생애를 묵상할 것이다.” 산길 1권 13장, 3.
성인의 이말은 근본적인 것이다. 사실 예수께 대한 사랑과 그분을 닮고자 하는 욕망이 우리 영혼 안에 없다면 앞으로 보게 될 여러 점들 안에서 언급되는 모든 규범들은 참아 견딜 수 없는 짐들이 될 것이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될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십자가의 성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방하려는 욕망이 한결 같아야 하고 그 영혼이 수행하는 모든 행위들 안에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포기를 가능하게 하고 거기에다 진정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시시각각으로 새로워지는 ‘실천적인 사랑’이다.
“순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 외에 다른 영적 진보의 길은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길이요 생명이요 진리이며 또한 구원의 유일한 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누구든지 쉽고 편한 길을 걷고 싶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본받는 길이 아니기에 나는 그런 정신을 좋은 것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 잠언 1.
4.1.1.3.2. 감각들에 대한 정화
예수께 대한 사랑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의지를 모든 감각적 즐거움들에 대한 포기에로 향하게 해야 한다.
“둘째는 하느님의 영예와 하느님의 영광에서 기인하지 않는 모든 감각적 즐거움을 영혼이 포기하는 일인데, 이는 지상 생애동안 성부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 외에는 어떤 다른 즐거움도 갖지 않으셨고 갖기를 원하지도 않으셨던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산길 1권 13장, 4.
4.1.1.3.3. 욕망들에 대한 정화
감각의 정화에 있어서 영혼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본성이 가장 싫어하는 것을 향애서 자신의 의지를 정향시킴으로써 욕망들에 대한 정화를 실천해야 한다.
사실 욕망들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감각이 즐거운 것에 집착하도록 한다. 이 욕들을 끊어버리기 위해서는 욕들이 요구하는 것들을 끊어버리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고 본성적인 욕망들에 반대되는 것들을 적극적으로 원함으로써 욕들에 대한 반격을 행함에까지 이르러야만 한다.
4.1.1.3.4. 자애심으로부터의 정화
성인은 마침내 자애심을 끊어버릴 것을 단호히 요구한다. 다시 말해서 이 교활한 자기 만족, 영혼의 구석구석에 스며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미묘한 친절마저도 끊어버릴 것을 요구 한다. 이것이 제거되지 않는다면 이 자애심은 하느님과의 일치를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린다.
감각의 정화의 마지막에서 영혼은 놀라운 일이자 그 자신의 보다 큰 기쁨으로서 모든 지상적인 맛들과 모든 피조물들로부터 자유로운 자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 설사 전에는 감각적인 집착들이 마치 땅에 깔린 송진처럼 발에 붙어 하느님과의 만남에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했다고 할지라도, 이제는 그 애착들이 끊어져서 자유롭게 달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랑하는 님과의 일치를 즐기기 위한 진정한 자유에로 날아오를 수 있게 된다. 참조 : 산길 1권 15장.
하느님 사랑이 영혼에게 이끌리는 것은 그 영혼의 위대함이 아니라 그 영혼의 절대적인 자아 포기와 깊은 겸손이다. 잠언 305
**에밀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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