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Lord/† 聖人들의 삶을 통해서

십자가의 성 바오로 (10월 19일) 신부 , 설립자

ohjulia 2006. 10. 19. 06:24
  십자가의 성 바오로
 

    십자가의 성 바오로 (St.Paul of the Cross ) 신부 , 설립자

    성인의 활동지역 : 성인의 활동연도 : 1694-1775년 성인과 같은이름 : 바울로, 바울루스, 빠울로, 빠울루스, 파울로, 파울루스, 폴 이탈리아의 오바다(Ovada) 태생인 성 바오로 프란치스코 다네이(Paolo Francesco Danei)는 몰락한 어느 귀족의 맏이로 태어났고, 부모의 신앙 유산을 물려받은 탓인지 15세 때에 이미 카스텔라초의 자기 집에서 엄격한 고행과 보속을 행하였다. 1714년 그는 터키인들과 싸우는 베네치아(Venezia) 공국의 군대에 입대하였으나, 기도와 보속생활에 이끌려 명예 제대를 하고 귀향하였다. 그는 결혼도 마다하면서 몇 해를 은거하던 중 1720년에 예수의 성명과 흰 십자가가 그려진 고난의 문장을 검은 옷에 단 성모님의 환시를 보았는데, 이때 그분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설교하는 수도회 설립을 명하셨다고 한다. 그의 환시가 올바른 사실임을 인정한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부터 수도회 설립에 관한 허가를 받게 된 바오로(Paulus)는 40일간의 피정을 통하여 회칙 초안을 마련하였다. 그는 자기 동생인 요한 밥티스타와 함께 로마(Rome)로 가서 교황청의 허가를 신청하였다. 처음에는 거절당하였으나 1725년의 방문에서는 교황 베네딕투스 13세(Benedictus XIII)로부터 수련자를 받아도 좋다는 허가를 받고, 1727년에는 자신이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들은 몬테 아르젠타리오에 수도원을 세웠는데, 처음에는 규칙이 너무 엄격했던 탓으로 많은 수련자를 잃었다고 한다. 1737년에는 첫 수도원의 문을 열었고, 1741년에는 교황 베네딕투스 14세로부터 개정 회칙을 승인받았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한 십자가와 고난의 맨발 성직 수도회’(예수 고난회)가 전세계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바오로는 자신의 뜻과는 달리 초대총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탈리아 전역을 누비며 선교 여행을 하였고, 그의 설교는 놀라운 힘을 발휘하여 만인의 심금을 울렸다. 또한 그는 초자연적인 은혜로써 축복을 내렸고, 치유의 기적과 원거리에서 동시에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기적 등이 나타났다. 그는 당대 최고의 설교가였다. 그는 예수 고난회의 최종 승인을 1769년 교황 클레멘스 14세(Clemens XIV)로부터 받았다. 또한 그의 노력에 의하여 여자 수도회 수녀들이 코르네토에 첫 수도원을 갖게 되었다. 그는 3년 동안의 병고로 고생하다가 1775년 10월 18일 로마에서 운명하였고, 1867년 비오 9세(Pius IX)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 십자가의 성 바오로는 1694년 북 이탈리아에 있는 제노아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철이 들자 열심하고 희생심이 많은 아이로 보통 아이들과는 어딘가 다른 점이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이 아이에게는 일찍부터 성모 마리아의 특별한 보호가 있었다. 어느 날, 냇가에서 놀다가 실수로 물에 빠져 죽을 위험에 처했을 때 갑자기 성모께서 발현하셔서 무사히 구해 주셨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랬기에 바오로가 성모께 대해 각별한 존경심을 갖고 열렬한 감사의 정을 품고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리고 은총의 인도하심에 따라 그는 주님 수난을 묵상하며 그 거룩한 모습에 도취되어 자신도 주님을 본받는 뜻으로 여러 가지의 고신 극기를 행하며 매 금요일에는 아주 쓴 초를 마시기도 했다. 이와 같이 바오로는 초장연적으로는 성모 마리아의 보호를 받고 세상에서는 경건한 양친의 교육을 받아 마음도 깨끗하고 몸도 깨끗하게 자라났다. 20세가 되었을때 주님을 위해 생명을 바치려는 일념에서 군인이 되어 때마침 터키와 싸우고 있던 조국 이탈리아군에 참가했다. 그러나 도중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 이와같은 현세의 전쟁보다는 차라리 초자연계의 영적 싸움에 참가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본래 사명이란 것을 깨닫고 군적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바오로는 동료 수명과 상의하여 알제다로 산이라고 하는 인기척 없는 깊은 산중에 들어가서 기도와 묵상의 거룩한 생활을 시작했으나, 주교께서 세상의 냉담자들의 마음에 다시 열렬한 신앙의 불을 질러 주도록 바오로 등의 적극적 활동을 바라자 그도 이에 동의해 우선 로마에 가서 베네틱토 14세 교황에게 신품 성사를 받는 한편 그의 허가를 얻어 ’예수 고난회’라는 한 수도회를 창립하고 자기의 동료들을 그 회에 입회시켰다. 바오로가 성직자가 되어 다시 알젠다로 산에 갔다가 돌아왔을때의 일이다. 성모 마리아께서 또다시 그에게 발현하셔서 흑색복장의 가슴에 심장이 그려져 있고 그 가운데 십자가와 예수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여주셨다. 바오로는 그것을 보고 새 수도회의 복장을 이같이 제정하라는 뜻인 줄을 깨달았다. 과연 새 수도회의 목적은 주로 회원 자신들이 예수의 고난을 묵상함과 동시에 일반 신자에게도 그 현의를 깊이 박아주는 데 있었으므로 이만큼 적당한 수도복은 다른 데서 볼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정식으로 이것을 자기 회의 수도복으로 결정했다. 또한 이 수도회는 성모의 통고에 대한 존경을 더 가지게 하는 것도 목적으로 삼고 있다. 그것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성 바오로는 그 열렬한 기도와 고행으로써 냉담한 신자나 죄인을 얼마나 많이 회개시켰는지 모르며, 그 회원들의 활동으로 인해 성모 통고에 대한 신심도 놀랄 만큼 단시일에 전파되어 그로 말미암아 의외의 은혜를 받은 사람도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성 바오로는 예수의 고난을 묵상할 때마다 늘 가슴에 주님께 대한 사랑의 열정으로 가득찼고 그로 인해 두 갈빗대가 밖에 나타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는 하느님께 장래 일이나 남의 마음 속을 들여다보는 특은도 받았다. 예수 고난회는 실로 놀라울 정도로 발전했다. 수년 후에는 여자 수도회도 창립되었다. 성 십자가의 바오로는 총장으로서 회원들을 전후 40년이란 장기간에 걸쳐 지도하고 자신의 덕행과 좋은 표양으로써 그들의 거울이 되었고, 고령이 되었을 때에 자기가 예언한 1775년 10월 18일, 평화 속에 운명했고, 1867년에 시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