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3주간 수요일>(2010. 4. 21. 수)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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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무일도 끝기도 후에 부르는 “살베 레지나” 노래 중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귀양살이 끝날 그때 당신의 아드님 우리 주 예수를 뵙게 하소서.”
인생은 귀양살이이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귀양살이에서 해방되는 것이고,
그때 예수님을 직접 뵙는 것이 우리의 희망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을 소풍이라고 노래한 시인도 있었지만,
귀양살이라고 하든, 소풍이라고 하든
하여간에 인생의 끝이 허망한 소멸은 아니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인생이란 귀양살이라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편안하고 즐거운 소풍이라고 하기에는 이런저런 사건 사고가 너무 많습니다.
천수를 누리다가 침대에서 편안하게 숨을 거두는 것은 정말 복 받은 것입니다.
일부 사이비 종파에서 종말론을 이야기하면서
최후의 심판을 무시무시하게 묘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무서운 심판을 피하려면 자기네 종파를 믿으라고 선전합니다.
사이비 점쟁이일수록 앞날의 불행을 무섭게 과장해서 이야기하고
잔뜩 겁먹게 한 다음 액땜이라는 명목으로 돈을 뜯어냅니다.
강론을 할 때 지옥, 심판, 멸망 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끔찍한 장면을 동원하면 됩니다.
효과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 효과는 오래 가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면서 회개를 하는 것 같지만
무서워서 회개하는 것은 오래 가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교회입니다.
결코 사람들에게 겁이나 주는 곳이 아닙니다.
슬퍼서 울던 사람도, 힘들고 괴롭던 사람도
그 슬픔과 괴로움에서 벗어나서 웃을 수 있게 해주어야 하는 곳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느낄 수 있게 해야 하고 희망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적어도 성당에서는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벌 안 받고 지옥에 안 가려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환영받고 상을 받기 위해서 믿는 것입니다.
같은 말 같지만 같은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무서워서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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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나라를 묘사하고 설명하면서 믿음과 희망을 주는 일은 좋은데,
그런데 하느님 나라가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한 곳인가를 묘사하는 일이 참 어렵습니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아름다움과 행복에 대한 묘사를 총동원해도
그다지 실감나지 않고, 사람들이 공감하지도 않습니다.
각자 생각하는 아름다움과 행복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하느님 나라를 인간의 언어로 설명한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닙니다.
(묵시록에서는 온갖 보석을 총동원해서 하느님 나라를 묘사했지만
그 보석들을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을 알지 못하니... 효과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정말 실감나는 구절이 하나 있습니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묵시 21,3-4).”
정말로 괴롭고 슬퍼서 몸부림치며 울어본 적이 있는 사람은
바로 그런 나라, 그런 행복을 소망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울어본 적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지금 울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죽이는 분이 아니라 살리는 분이라는데
그렇게 착하고 그렇게 열심히 하느님을 믿었던 내 아들을,
그런 내 아들을 왜 데려갔냐고 울부짖을 때,
사실 어떤 말로도 위로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럴 때 “하느님의 뜻이니 받아들여라.” 라는 말은 불난 집에 부채질입니다.
그냥 함께 울고 함께 기도할 뿐입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슬픔을 겪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단 한 번도 이별을(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웃기만 하면서 사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있다면... 사람이 아닙니다. 그냥 기계 인간입니다.
천사들도 인간의 불행을 아파하면서 눈물을 흘리는데,
말 못하는 짐승들도 눈물을 흘리는데,
평생 단 한 번도 슬픔을 겪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실상 모두 같은 처지입니다.
함께 귀양살이하는 동료들이라는 것입니다.
지진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배가 침몰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병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이제 어떻게 살고,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그것은 남은 사람들의 숙제입니다.
아무리 먼저 떠난 사람이 그립고, 그리움에 슬프고 괴로워도
남은 사람들에게는 끝까지 살아남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떠난 사람이 못 다한 사랑, 못 이룬 꿈, 그건 이제 남은 사람들의 몫입니다.
(살아남아서 평생 보속한다, 죗값을 치른다는 건 전혀 다른 경우의 이야기입니다.)
먼저 떠난 사람 때문에 울지만 언젠가는 다시 만나서 웃게 될 것이라는 희망...
그 희망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다면 끝까지,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