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ily/† 오늘의 강론

어떻게 하란 말인가?|†

ohjulia 2010. 8. 16. 02:03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2010. 8. 16. 월)

     

    <어떻게 하란 말인가?>

     

    어떤 부자가 예수님께 와서 질문합니다.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계명들을 지켜라.”

     

    만일에 그 사람이 “알았습니다.” 하고 그냥 갔다면,

    그래서 질문과 대답이 거기에서 끝났다면 아주 간단해집니다.

    계명들만 잘 지키면 된다는 가르침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스스로 뭔가 부족한 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 사람은 슬퍼하면서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이라는 말과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이라는 말이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일까?

     

    그 사람은 계명들은 다 잘 지켜 왔다고 했습니다.

    (다른 복음서를 보면, 그가 계명을 잘 지킨 것은 예수님도 인정하십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기가 바라는 대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완전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보다 한 단계 더 높은 무엇일까?

    그것은 어떻게 구별되는 것일까?

     

    이 이야기 다음 장면은 그 유명한 “낙타와 바늘구멍”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과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아니면 그냥 같은 것인가?

     

    다시 이야기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셨고,

    십계명 조항들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그건 잘 지켰지만 무엇이 부족하냐고 질문합니다.

    그 자신이 스스로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답변에서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이라는 말은

    계명들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불완전하다는 뜻이 될 수도 있고,

    그 사람이 계명들을 지킨 것은 인정하지만

    불완전하게 지켰다는 뜻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뜻이 다른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입니다.

    죄를 안 지으려고 노력하는 소극적인 태도로 계명을 지키는 것은

    계명을 지킨 것이긴 한데, 불완전하게 지킨 것이고,

    그렇게 계명을 지킨다면, 계명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불완전하다는 뜻도 됩니다.

     

    계명을 완전하게 지키려면, 또는 계명을 지키는 것을 완성시키려면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이것은 계명에 담긴 사랑의 정신을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죄를 안 지으려고 노력하는 소극적인 태도에서 벗어나서

    계명의 근본정신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태도,

    즉 사랑의 실천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안식일 율법을 어기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안식일의 근본정신인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미사에 빠지지 않고 성실하게 참례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미사 중에 예수님을 만나고 자신을 온전하게 봉헌해야 한다는 것.

    이웃을 죽이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이웃을 살려야 한다는 것.

    불효를 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적극적으로 효도를 해야 한다는 것.

    지옥에 가지 않으려는 태도가 아니라 천국에 가려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

     

    그렇다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과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의 답변에 슬퍼하면서 떠나갔지만

    (자기의 재물을 포기할 수가 없어서)

    그럼 그 사람은 지옥에 가게 되는 것입니까?

    그렇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죄를 지은 일이 없는 사람이라면, 계명을 잘 지켜 온 것이 사실이라면,

    계명의 실천이 불완전하다고 해서 지옥에 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부족함에 대해서는 하느님께서 따로 물으실 것입니다.

    지옥에는 안 가겠지만, 하느님 나라에 바로 들어가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

     

    광복절을 지냈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분명히 친일파는 아니고,

    일본의 지배를 지지하거나 친일적인 행동을 한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해서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한 것도 아니고,

    독립투사들을 후원하지도 않고, 그냥 그렇게 살았던 사람들...

    당시 많은 백성들이 그렇게 살지 않았을까?

    마음은 있지만 몸이 따르지 않는 것.

    독립운동을 돕고 싶고 독립투사들을 존경하지만 먹고살자니 그게 안 된다는 것.

    물론 해방되었을 때에는 어떻든 모두 다 기뻐하고 경축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시절에도 좋은 점은 있었다고 그리워하는 일도 가끔은 있고)

     

    소극적으로 계명을 지키는 것과

    적극적으로 계명을 지키는 것 사이의 경계가 모호하긴 합니다.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건 부자가 아닌 가난한 사람에게도 어려운 일입니다.

     

    다시 묻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란 말인가?

     

    복음 말씀의 그 부자가 슬퍼하면서 떠난 것은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 아니라

    재산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포기하기엔 가진 것이 너무 많았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목표는 하나이고, 그 목표에 도달하는 길도 하나입니다.

    그 길로 가든지 안 가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다른 길, 쉬운 길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진짜로 융통성 없는 분이십니다.

    그런 분을 믿고 따르려면 우리도 융통성을 버리고 고지식하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현실적으로 실천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다른 대안을 제시해달라고 예수님께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요구한다고 들어주실 분도 아닙니다.

    실제로 그렇게 살지는 못해도 그런 마음으로 살면 되는 것 아니냐고

    어정쩡한 타협안과 절충안을 내놓을 수도 없습니다.

    그건 예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변질시키는 일입니다.

     

    예수님 명령은 간단합니다. “내가 하라는 대로, 그렇게 하라.”

     

    정말 어려운 일이지만 그렇게 살았던 사람들이 있고,

    그런 분들을 우리는 성인 성녀라고 부르고 존경하고 있습니다.

    존경한다면 그 뒤를 따라가야 합니다. 존경만 하지 말고.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