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ily/† 오늘의 강론

봉헌

ohjulia 2010. 11. 22. 02:14




    <연중 제34주간 월요일>(2010. 11. 22. 월)(루카 21,1-4)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봉헌>

     

    창세기의 ‘노아의 홍수’ 장면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모든 생물의 멸종을 막기 위해서

    짐승들을 방주에 데리고 들어가라고 노아에게 명령하십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하나 있습니다.

    홍수가 끝난 다음에 노아가 하느님께 제사를 바치는데,

    살아남은 정결한 짐승들 중에서 번제물을 골라서 바친 것입니다.

    번제라는 것은 제물을 죽여서 불에 태워 바치는 제사입니다.

    그러니까 홍수에서는 살아남았지만

    번제물로 바쳐지면서 죽은 짐승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거면 왜 살려냈나? 그 짐승들은 그냥 멸종된 것 아닌가?)

    종마다 한 쌍씩 살려냈다면(창세 6,19) 제물로 바쳐진 짐승들은 멸종된 것이고,

    일곱 쌍씩 살려냈다면(창세 7,2) 몇 쌍은 살아남았을 것이고...

    하여간에 번제물로 바쳐진 짐승들 입장에서는 정말로 억울한 일이 될 수도 있는데,

    그 짐승들이 생각할 능력이 있어서,

    자기가 번제물로 선택된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다면

    그들은 최고의 봉헌을 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었다가

    그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신 이야기도 비슷합니다.

    그럴 거라면 왜 아들을 주셨느냐고 항의하고 따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묵묵히 제사 준비를 했고, 진짜로 아들을 바치려고 했습니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인간의 봉헌 중에서는 최고의 봉헌입니다.

    신, 구약성경 전체에서 최고의 봉헌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하느님의 외아드님이 인간들을 위해서 스스로 제물이 되었기 때문에......

    그러니까 결국 최고의 봉헌은 예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강론 주제를 ‘봉헌금에 관해서’로 잡으면 여러 가지로 껄끄럽고,

    강론하기도 불편하고, 듣는 사람도 불편할 때가 있습니다.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뭔가 떳떳하지 못한 점을 느낄 때 그렇게 됩니다.

    뭔가 떳떳하지 못한 점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아무도 자신 있게 최고의 봉헌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점이 그것입니다.

     

    본당 운영 예산서를 작성할 때,

    많은 본당에서 지출을 먼저 정하고, 그 다음에 수입 계획을 세웁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지출해야 할 돈은 늘 정해져 있기 때문에

    수입 쪽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를 고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본당신부 시절에 반대로 했습니다.

    수입 쪽은 들어오는 대로 놓아두고 그 수입에 맞춰서 지출을 정한 것입니다.

    그러니 절대로 적자가 될 일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해야 할 일도 못하고 늘 쪼들리지 않겠는가?

    라고 반문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돈이 없어서 해야 할 일을 못한 적은 없습니다.

    지출을 줄인다고 쪼들릴 것도 없습니다. 실제로 쪼들린 적도 없습니다.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면 해야 할 일은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전에 있었던 본당에서 파출부 인건비를 줄이고 자취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다른 신부님들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밥하고 빨래하는 시간을 줄여서 사목활동에 더 힘을 쏟는 게 옳지 않은가?

    (그 말을 듣고 저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내가 밥하고 빨래하는 시간 때문에 사목활동을 덜 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속으로만 생각한 것은, 그걸 입 밖에 내어서 말하면 교만하다고 할 것 같아서...)

     

    천주교 신자들은 개신교 신자들보다 봉헌 정신이 약하다든지,

    개신교 신자들이 십일조 헌금을 잘 내는 것을 본받아야 한다든지

    천주교 신자들은 봉헌금도 적게 내고 인색하고 어쩌고, 저쩌고...

    그런 말을 들을 때가 가끔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그렇게 보는 사람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 말을 하기 전에 자기가 먼저 그렇게 봉헌하는 것이 옳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이 먼저 모범적으로 십일조를 낸 다음에 그런 말을 해야 합니다.

    아무도... 사제라고 해도... 봉헌에서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본당신부 자신이 먼저 십일조 헌금을 내고, 교무금을 내고, 봉헌금을 낸다면...

    본당 운영의 어려움이 많이 줄어들 것이라고....... 저 혼자만의 생각입니다.

     

    강론을 듣는 입장에서, 정말 듣기 싫은 이야기는

    첫째는 돈 이야기이고, 둘째는 정치 이야기입니다.

    (이건 저의 경험입니다. 저도 신부가 되기 전에는 평신도였으니...)

    그래서 저는 본당에서의 강론 때에는 거의 돈 이야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할 필요가 없기도 했습니다. 늘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헌금이 들어왔으니...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면 저절로 봉헌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목자들이 일차적으로 할 일은 감사하는 마음이 우러나도록 하는 일입니다.

    본당 운영이 힘들다는 말을 하면 할수록 짜증만 나는 것이 사람의 심리입니다.

    그건 본당 운영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뜻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글을 혹시라도 다른 신부님들이 읽는다면 기분이 언짢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글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작고 가난한 본당을 네 군데나 거치면서

    실제로 경험하고 깨달았던 일들을 적은 것입니다.)

     

    11월 22일의 복음 말씀,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로 강론할 때,

    흔히 상투적인 말을 하기가 쉽습니다.

    바치는 돈의 액수보다 마음이 더 중요하다, 가난한 과부를 본받아야 한다, 라고.

    그러면서 부자들이 더 많이 내지 않는 것을 비판하는 쪽으로

    강론 내용이 흘러갈 때가 많습니다.

    만일에 본당의 신자가 백 명인데 그중에 아흔아홉 명이 가난한 과부이고,

    나머지 한 명만 부자라면 그 부자는 그 강론을 듣고 있기가 많이 불편할 것입니다.

    그런데 정반대로 아흔아홉 명이 부자이고 한 명만 가난한 과부라면,

    그 한 명도 강론을 듣고 있기가 많이 불편해집니다.

    복음 말씀에 나오는 가난한 과부와 금방 비교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어떤 특정 계층이나 특정 부류의 사람들을 겨냥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신 자신의 모범을 따르라고 촉구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지금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입니다.

    봉헌을 할 때에는,

    바치는 돈에 대해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바치고 나서 남아 있는 돈을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얼마를 바쳤느냐, 그것에만 집중하면 여러 가지로 복잡해집니다.

    바치고 나서 남아 있는 것이 얼마나 되느냐? 그렇게 생각하면 간단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바치려고 할 때

    그에게는 이스마엘이라는 다른 아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는 예수님 말고 다른 아들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바칠 때 자신을 위해서 남겨 놓은 것도 없습니다.

    목숨, 명예, 자존심...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과부가 칭찬을 받은 것도 자신을 위해서 남겨 놓은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은 어렵습니다.

    당장 죽을 것도 아니라면 다음날 먹고살 걱정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은 본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실제로 돈을 얼마나 바치고, 얼마나 남겨 놓았는지를 계산하지 말고,

    봉헌을 하는 그 순간 하느님 생각은 얼마나 하는지,

    그 순간에 자기 자신에 대한 걱정은 얼마나 하는지를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조금 더 남겨놓으려고 멈칫 하는 순간에 봉헌의 정신이 후퇴하게 됩니다.

    봉헌금이라는 말에 대해서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형편대로 하면 그만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내 걱정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가? 바로 그 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나는 무엇을 가장 걱정하고 있는가? 그걸 생각해야 합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봉헌의 마음이 왔다 갔다 할 수 있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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