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ily/† 오늘의 강론

[스크랩]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ohjulia 2012. 6. 18. 06:56

<연중 제11주간 월요일>(2012. 6. 18. 월)(마태 5,38-42)

 

<선, 정의, 사랑>

 

6월 18일의 복음 말씀은

마태오복음 5장 38절-42절, '폭력을 포기하여라.'이고,

독서 말씀은

열왕기 상권 21장 1절-16절, '아합이 나봇의 포도밭을 빼앗다.'입니다.

 

아합 왕이 나봇이라는 사람의 포도밭을 가지고 싶어 했는데

나봇은 율법을 이유로 포도밭을 팔기를 거절합니다.

조상들의 상속 재산은

한 지파에서 다른 지파로 넘어가면 안 된다는 것이 율법입니다(민수 36,6-9).

율법으로 정해져 있는 일이기 때문에

돈으로도, 왕의 권력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왕비 이제벨이 음모를 꾸밉니다.

불량배 두 사람을 시켜서 나봇이 하느님과 임금님을 저주했다고 고발하게 하고,

나봇이 사는 성읍의 원로들과 귀족들을 동원해서 재판하게 하고,

그를 사형시키게 합니다.

그렇게 나봇을 죽인 다음에 그의 포도밭을 차지합니다.

 

이런 경우라도 상속 재산은 가장 가까운 친족에게 넘어가야 한다는

율법(민수 27,11)을 따라야 하는데,

아합과 이제벨은 율법을 무시하고 그냥 나봇의 포도밭을 차지합니다.

 

왕과 왕비는 자기들의 권력만 믿고 하느님을 무시하면서

살인과 강도짓을 했고,

원로들과 귀족들과 백성들은 하느님보다 왕의 권력을 더 무서워해서

공범이 되었습니다.

 

자, 이 경우에 나봇의 가족들이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복수를 하고 싶어 했다고 해도 무슨 힘이 있어서 복수를 하겠습니까?

힘이 없으니 그냥 참아야 합니까?

이 경우에 '용서' 라는 말은 참으로 의미가 없는 말입니다.

 

하느님께 호소하는 일 외에는

힘없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직접 나서서 대신 복수를 해주십니다.

 

주님의 말씀이 엘리야 예언자에게 내렸고,

엘리야 예언자는 아합에게 가서 그 말씀을 전합니다.

"주님이 말한다.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던 바로 그 자리에서

개들이 네 피도 핥을 것이다(1열왕 21,19)."

"개들이 이즈르엘 들판에서 이제벨을 뜯어 먹을 것이다(1열왕 21,23)."

이 예언은 나중에 그대로 실현됩니다(1열왕 22,38 ; 2열왕 9,35).

 

(6월 18일의 독서 말씀은

아합과 이제벨의 범죄 장면이고,

6월 19일의 독서 말씀은

엘리야 예언자가 아합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복음 말씀에서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마태 5,39).' 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독서 말씀의 내용과 합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로마 12,19)."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라는 구약시대 동태복수법의 원래 취지는

'복수를 하라.'가 아니라, '당한 것 이상으로 복수를 하지 마라.'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원래 취지와 다르게

복수를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고, 또 과잉복수를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동태복수법을 폐기하시고 새로운 가르침을 주십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라는 말은 '악에 맞서지 마라.'가 아니라,

'악인에게 악으로 맞서지 마라.'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으면 똑같은 악인이 될 뿐입니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라는 말은

실제로 그렇게 하라는 말이 아니라,

같은 방법으로 앙갚음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예수님 특유의 과장법적인 표현입니다.

 

재판 중에 어떤 경비병이 예수님의 뺨을 쳤을 때(요한 18,22),

예수님은 다른 뺨을 돌려 대신 것이 아니라 그 경비병을 꾸짖으셨습니다.

대사제가 부하들에게 바오로 사도의 입을 치라고 명령했을 때(사도 23,2),

바오로 사도는 대사제를 위선자라고 비난하고 그에게 항의했습니다.

 

우리는 악을 제거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야 하는데,

그 방법은 악(惡)이 아니라 선(善)이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나봇처럼 힘없는 사람이

힘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억울하게 당하는 일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정의로운 세상'과 '사랑이 넘치는 세상'은 서로 상관없는 세상이 아닙니다.

'사랑'과 '정의'가 함께 있어야 비로소 선(善)이 완성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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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Rev.S.Moy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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