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55, 1-3.
로마 8, 35.37-39.
마태 14, 13-21.
보통 오늘의 이야기는 성체성사의 예표로 알려져 있습니다.
초대교회 안에서 성찬을 나눌 때 오늘의 말씀이 주는 교훈들을 깊이 새겼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성찬을 나누고 있는 우리들이 이 말씀을 들으면서 무엇을 새겨야 하는가?
오늘은 그 이야기를 나누어 볼까 합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메시지의 시작은 ‘한적한 곳’이라는 것과 사람들이 ‘예수를 보려고
왔다’는 것입니다.
세상사는 데에 지쳐서, 누구도 자신들에게 위로를 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오로지 지금
예수 이분만이 자신들을 영적으로 육적으로 치유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예수께
몰려왔습니다.
그들이 비록 믿음은 아니라 하더라도 예수에게서 무엇인가를 얻고 싶었던 것은 사실이며
그 수효가 장정만도 5천명이라는 사실을 두고 보면 얼마나 어마어마한 숫자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의미론적으로 이해하고 싶은 유혹에 빠집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이성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 기적이야기에 예수께서
신뢰를 보이시고, 꼬마 아이가 있는 것을 내놓자 먼 거리를 떠나오면서 먹을 것을 챙겼던
많은 사람들이 조금씩 조금씩 각자 챙겨왔던 것을 내놓았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았다.’
이건 신앙에 대해 잘 받아들이기 힘든 꼬마아이에게나 함직한 강론이 아닐까요?
기적을 신앙으로 받아들이지 못할 때 우리는 더더욱 하느님이신 분이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는 것이나,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셨다는 사실에 대해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 기억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 되는 일이 없다”(루가 1, 37)는 것.
사람들이 각자 먹을 것을 내놓아서 나누었다면, 그들이 “사흘 동안이나 굶주렸다든지”
(마르 8, 2), 예수를 “왕으로 모시려 하는”(요한 6, 15) 행위는 또 무엇이겠습니다.
그들은 진정 먹을 것이 없을 정도로 굶주리고 있었고, 상상하기 힘든 놀라운 기적 앞에서
그들의 메시아, 왕으로 세우려는 움직임이 저절로 생겨난 것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기적 이야기 중 4복음서가 공통되게 전해주고 있는 유일한 기적이야기입니다.
그만큼 중요한 것이고,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는 것을 알게 하는 대목이죠.
다시 처음 시작으로 가보면, 예수께서는 “한적한 곳”으로 향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을 쫓아갔던 사람들은 예수를 만나고 다시 그 안에 머뭅니다.
예수께 머물고 싶어 온 사람들을 예수께서는 책임지십니다.
제자들은 빵이 없다는 이유로 헤쳐 보내려고 하지만,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예수 마음과 제자 마음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지니신 목자의 마음은 필요로 온 사람들에게 그 갈증을 풀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 스스로 음식을 사먹도록 그들이 가야 합니다.’(마태 14, 15)라고 말하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갈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 16)라고 말씀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애시당초 예수께 몰려왔던 그들은 어느 하나 배고프다고 투정부린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느라고 배고픈 줄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즉 영적인 양식을 받으려 왔던 그들은 영적인 것에 신경이 쓰여 있지만 예수님과 제자들은
그들의 배고픔에 대해 걱정합니다.
분명 이것은 사랑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모두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해결하는 모습이 다르죠.
예수께서는 지금 여기에서 사랑을 나눌 것을 원하시고, 제자들은 이것저것 재어보고
나름대로 합리적인 결정을 내립니다. 그리고 근방으로 흩어져 제각기 먹을 것을 사먹게
하자고 건의를 드립니다.
그럴싸해보이지만, 근처 마을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먹일 양식을 비축해 두었을 리 없습니다.
한두 명도 아니고 장정만 5천 명 그러니 만 명도 넘는다는 얘기인데….
어차피 사람들을 돌려보내도 해결이 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결국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그런 때가 있다. 내 마음이 이래서, 내 상황이 이래서, 지금은 때가 아니어서,
나름대로 합리적인 핑계를 대면서 당장 필요한 사람들을 돌려보낼 때가 많지만,
핑계일 때가 많다.)
예수께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마태 14, 16)고 말씀하실 때, 제자들은 우리에게는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밖에 없다고 답하는데 사실입니다.
제자들은 오랜 전도 여행 끝에 가진 것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너희가 가진 것이 충분하느냐? 하고 물으신 것이 아니라,
너희가 가진 것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을 먹일 수 있겠느냐? 하는 믿음의 물음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제 것을 내놓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초라하기 그지없는 빵과 물고기를 들고
감사 기도를 드리시고 축복하십니다.
“하늘을 우러러본다”(마태 14, 19)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버나드쇼는 젊은 나이에 사형을 당했던 성녀 요안나의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인은 하늘을 우러러보았습니다. 그 하늘이 비어있다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구원자께서 가장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성인에게 나타나셨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
합니다. 성인은 마침내 주님을 부르며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이것은 성인의 삶의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예수께서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나 ‘뽕나무가 뿌리째 뽑혀 바다에 심겨지는
믿음’, ‘커다란 산을 바다에 옮겨지게 하는 믿음’이 무엇인지 이 행위로써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고나서 이제 예수께서는 우리가 해야 할 일 즉, 가진 것을 나누는 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내가 가진 것을 예수께 내어드릴 때(이 내어드림은 과부의 동전 한 닢처럼 전부라할 수 있는
나눔을 의미하는 것이다. 제자들이 빵과 물고기를 내어드릴 때 그것은 그들의 전부였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몇 배의 풍성한 열매를 만들어주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명하시는 것처럼 우리가 받은 것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신앙인의 정체성은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주님께 내어드리고, 주님께 받은 것을 다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신앙인의 정체성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위한 빵이 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친절한 인사에 허기져 있고, 격려와 칭찬 등에 목말라하고 있고,
혹은 작은 감사의 표시에 허기져 있습니다. 이런 작은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서로에게 봉사하고 헌신하여 서로 결합되는 빵이길 원합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빵이 되어 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예수의 몸인 빵을 모시는 것은 혼자
다 먹어치우는 꼴이 됩니다. 이는 우리의 배고픔을 결코 채워주지 않습니다.”
(마테르누스 아이닉)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본다면 “한적한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일상에 찌든 우리가 일상을 버리고 한적한 이곳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예수 곁에 머물러 좀더 많은 갈증들을 채우려고 합니다.
이에 오늘의 제자는 내가 가진 것을 주님께 다 드려야 하며, 주님께 받은 것을 여러분에게
나누어 드려야 합니다.
오늘의 제자는 또한 여러분도 됩니다.
여러분 역시 이 자리에서 주님께 내가 가진 것을 내어드리며 주님께 받은 것을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주님께 말씀드리십시오 .
예수께서는 무엇이라고 지칭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을 이리로 가져오라”(마태 14, 18)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어드리는 그 무엇인가가 주님 안에서 기적의 도구가 됩니다.
주님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결국 오늘의 말씀은 주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과 우리의 나눔이 어우러지는 기적이야기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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