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ily/☆ 라우 신부님과 함께

몇 번이라도...

ohjulia 2005. 9. 11. 03:05




고향으로(그리스도의 향기)
  
    집회 27, 33-28. 로마 14, 7-9. 마태 18, 21-35. 오늘의 말씀은 18장 공동체의 생활 규율과 윤리원칙을 마무리해주는 말씀입니다.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첫째, 용서의 양이냐? 질이냐? 둘째,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편에서의 무자비입니다. 베드로는 앞서 예수께서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형제의 죄를 타이르라는 말씀을 듣고, ‘나’와 ‘너’에 관련된 죄는 어찌할지 예수께 묻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제게 죄를 지으면 그를 몇 번이나 용서할까요? 일곱 번까지 할까요?” (마태 18, 21) 베드로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 어깨를 약간 으쓱였을 것입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한 사람이 잘못하면 보통 두세 번 정도 용서를 했고, 그러니 제 딴에는 쓴다고 썼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수난에 대해서 안 된다고 나섰다가 사탄이라고 꾸지람을 들은 것도 이참에 만회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너에게 말하지만, 일곱 번까지가 아니라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마태 18, 22 :200주년 번역) 네가 완전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넘어서, 완전에 완전을 더해, 셀 수 없이 무한하게 용서를 해주어라. 즉 용서의 양과 질의 문제입니다. 베드로는 제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용서했으니 이만하면 되겠습니까? 라고 말씀드렸는데, 그 양으로 이야기 한다면 일흔 번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보다 무한하게 용서하라는 것이죠. 그러면서 비유의 천재 예수께서는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왕에게 일만 달란트를 빚졌다. 그런데 왕은 그의 빚을 탕감해 주었다. 바로 이것이 자비이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 것을 빚과 연결을 시키는데, 우리는 주 하느님께 용서의 빚을 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빚이 얼마인가? 일만 달란트! 이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돈입니다. 지금이야 한 달란트가 육천 데나리온이고, 한 데나리온은 한사람의 노동자가 하루에 벌어들일 수 있는 돈이니, 하루 품삯을 5만원으로 계산하면, 음…. 3조원? 이렇게 계산이 나오지만, 당시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돈이고, 예나 지금이나 개인이 만질 수는 더더욱 없는 돈입니다. 그 돈을 빚졌다니 그야말로 가망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예수께서는 전혀 가망이 없는 상태(그를 끌어냈다는 것으로 보아 이미 감옥에 갇혀 있어 갚을 수도 없는 상태)에서, 자신과 아내 자식까지 종으로 팔아야 하는 상태에서(출애 22, 2; 2열왕 4, 1; 느헤 5, 5;이사 50, 1 참조), 탕감을 받았다는 데에 주목하라고 하십니다. “제 사정을 봐주십시오. 당신에게 모두 갚아드리겠습니다.”(마태 18, 26) 이 종이 한 얘기라고는 겨우 이 말밖에는 없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임금의 마음을 움직일만한 이야기를 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다 갚아드리겠다”고 한 말은 사기와 같습니다. 하늘에서 돈이 비처럼 쏟아지는 것이 아니라면, 헤로데가 일 년에 관할 지역 전체에서 벌어들일 수 있는 돈도 겨우 이백 달란트이니까 그는 그런 액수를 갚을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자비하신 임금은 이 종을 측은히 여겨서 빚을 탕감해 줍니다. (우리 역시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다 갚을 수 없다. 누가 자신하고 있는가) 이것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이죠. 하느님께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우리의 삶을 자비로이 용서해주셨습니다. “당신에게 모두 갚아드리겠습니다”라고 하는 애타는 진실이나 거짓말인 우리의 바람과 애원을 다 아시면서도 들어주시는 분, 바로 그분이 하느님이십니다. 그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보면서 신앙의 가르침에 관한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야 할 것 같은데, 자비로우신 아버지(우리가 알고 있는 탕자의 비유)의 경우에서처럼 이야기가 계속 이어집니다. 그 말은 우리의 경우를 비추어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겠죠. 하느님은 자비하신데 우리는 어떠냐 하는 것입니다. 빚을 탕감 받은 행운아, 이 종에게도 빚을 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가 다름 아닌 동료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을 믿는 공동체와 연관을 시키십니다. 그 빚은 진 동료는 자신처럼 도저히 갚을 길이 없는 상태도 아닙니다. 백 데나리온이면 가난한 일꾼에게는 큰돈이긴 해도 도저히 갚을 길이 없었던 첫 번째 종과는 달리 석 달 정도 안 먹고 모으면 갚을 수 있는 돈입니다. 아니면 다른 이에게 꾸어서라도 갚을 수 있는 돈입니다. 그런데도 이 첫 번째 종은 기다려주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첫 번째 종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마태 18, 30)라고 말합니다. 본전 생각이 난 것일까요? 내가 빚진 것과 다른 이가 빚진 것을 생각해보면, 그저 모든 것이 감사할 일인데도, 그는 내가 탕감 받은 것은 생각지 않고 내 것만 생각했습니다. 그의 행동만 떨어뜨려 놓고 보면 그의 행동은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조금 무정하기는 해도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 것입니다. 내가 받은 것은 생각지 않고, 내가 준 것만 생각하는 모습. 예수께서는 이 예를 드시면서 그것이 흡사 우리의 모습과도 비슷함을 알아보셨을 것입니다. 용서하려고 하면, 무엇인가 내주려고 하면 할 수 있는데, 힘들더라도 주님께 받은 것을 생각하면 할 수 있는데, 우리는 이 첫 번째 종의 경우처럼 “그러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다는 것이죠. 용서하려고 해도 잘 되지 않는 것인데, 용서하려고 하는 마음조차 갖지 않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이죠. 사실 하느님은 나의 용서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으로, 또한 주님께 기대면서 용서하고자 하는 마음을 끊임없이 보여야 합니다. 내 아이가 걸음마를 할 때, 걷고자 하나 넘어지게 되더라도 계속 지켜주고 일으켜 주었던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나를 일으켜 주십니다. 그렇다면 나도 나에게 그리고 다른 이에게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가 넘어졌다면(그가 잘못했다면) 지켜봐 주어야 합니다. 동료가 첫 번째 종에게 청했던 것은 사실 단지 시간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와는 달리 갚을 수 있었기에 시간을 달라고 말한 것인데, 우리의 닫혀진 마음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루가 복음 7장에서 두 빚진 자의 비유를 드시면서 많이 용서받은 사람은 많이 사랑하고,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첫 번째 종도, 그리고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로 용서를 받았고 받고 있는 우리도 많이 사랑하고 많이 용서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마무리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마음으로부터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 35) 용서는 그리스도인의 의무가 아니라 본질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용서하는 사람입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죠. 그것은 베드로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용서의 횟수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고 하면 이만했으면 되지 않았느냐고 횟수에 매달리면서 횟수를 채우는 데 관심을 갖고, 스스로 이만하면 됐지 않느냐하는 경계를 긋게 될 것입니다. 마음으로부터 용서를 하면 내 마음에서 그 모든 것이 사라집니다. 내 마음에서 자비와 사랑으로 그 빚을 완전히 몰아내는 것이죠. 그러나 그 힘은 주님께 구해야 합니다. 내가 용서를 해야겠다라고 마음을 먹으면 자꾸 내 본전이 생각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나에게 어떤 짓을 했는데’라고 생각하면 내가 용서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말씀은 주 예수를 따르고 있는 신앙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신앙인은 먼저 나를 자비로이 용서하고 받아들여주신 주 하느님을 생각하면서 그분의 자비에 힘입어 다른 이들을 용서할 힘을 구하는 것이죠. 부스러기 : 복수는 복수를 낳고 용서는 용서를 낳습니다. 화씨 9.11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전쟁은 승리함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되는 것입니다.”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전투적으로 나오고 있는 부시 행정부이지만, 오히려 테러는 더 늘었다고 하죠. 그는 오늘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이 부자비한 종의 비유를 새겨들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