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열왕 19, 9ㄱ.11-13ㄱ
로마 9, 1-5.
마태 14, 22-33.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괴테는 에커만과의 대화를 통해 오늘의 말씀을 읽고서
“이 이야기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야기 중의 하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비록 그가 신앙의 관점에서 말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진정 오늘의 말씀은
신앙의 길을 가고 있는 우리에게 있어 커다란 교훈과 힘을 실어주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의 배경은,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후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따로 배를
태워 보내시고 당신은 기도하러 가셨는데, 제자들이 역풍을 만나 고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한참 고생을 하고 있을 때 예수께서 그들에게 다가오시는 것으로 ‘물 위를
걷는 기적’의 이야기가 시작되죠.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 시달립니다.
이 ‘시달린다’는 단어가 눈에 들어오는데, 우리의 삶이 이렇습니다.
제자들이 풍랑에 시달리는 것처럼, 우리 역시 삶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문제에
시달립니다. 일상의 갈등, 직업문제, 가족문제, 불안과 걱정, 희망과 기쁨 등이
서로 얽혀서 나의 삶을 힘겹게 하죠.
오늘의 말씀은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란 오직 예수밖에 없다고 제시합니다.
나를 위로해주고, 나를 살리실 수 있는 구원자는 오직 예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내게 필요한 것은 단 한 가지!
그분께 다가가 그분 안에 머무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기에 주님께서는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매번 같은 목소리로 ‘무엇을 원하느냐?
나다’ ‘누구를 찾느냐? 나다’ ‘어디를 향하느냐? 나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목소리는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고 단호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베드로가 예수를 부르듯이 ‘주님’하고 강하게 외쳐야 합니다.
오직 예수밖에 없다는 믿음으로 그분을 불러야 합니다.
“주님” “나다!”
“주님!” “그래, 나야!!”
“주님!!” “힘을 내라! 그 주님이 바로 나란다!!!”
베드로는 “힘을 내라”(마태 14, 27)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힘을 내서, 용기를 내서
예수께 다가갑니다.
오로지 예수의 힘으로, 나를 괴롭혔던 풍랑의 물, 나를 시달리게 했던 사건들,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들과의 관계,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던 과거를 밟고서 당당하게
걷습니다.
이렇게 이야기가 굳은 믿음으로 끝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베드로는 거센 바람을 만나자 또다시 두려움에 빠집니다.
두려움을 딛고 걷던 그가 두려움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께서는 “왜 의심을 품었느냐?”(마태 14, 31)하시는데, 이 의심이라는
단어는 두 마음을 품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 길을 동시에 바라보는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은 ‘왜 오직 외길인 나만 바라보면서 와야지 다른 쪽을
바라보느냐?’ 라는 말씀이죠.
주님께 청했으면, 그리고 주님 안에서 놀라운 사건을 경험하고 평화를 얻었으면 그 길을
계속 가야지 자꾸 한 눈을 파느냐 라는 것입니다.
양다리 신앙이란 없음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죠.
우리는 나를 버리고 주님을 택할 때 영적 가벼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세상 것들을 다 짊어지고서는 도무지 무거움에 물 위를 걸을 수 없습니다.
‘와라! 너를 버리고!’ ‘네가 끌어안고 있던 것을 버리고 떠나올 때, 너는 어느새
가벼워 물 위를 걸을 수 있다’ 이것이 예수님의 음성입니다.
사탄과 천사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늘 우리의 삶에는 선택의 갈림길이 있는데,
신앙으로 이야기하면 이 천사와 사탄의 갈림길이 우리의 삶을 좌우합니다.
천사는 히브리어로 ‘말락’에서 유래된 것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사탄은 히브리어 ‘사탄’ 그대로 ‘반대한다’는 것이죠.
그러나 애시당초 이 사탄의 존재도 천사의 존재와 같았다는 데에서 사탄의 유혹은 우리에게
버겁게 느껴집니다.
‘어차피 빠진다니까?’ ‘그래봐야 뭐해, 그냥 즐겨’ ‘대충 해도 돼’ 선악과를 따먹게
했었던 그 교묘함으로 우리를 괴롭히고, 예수가 아닌 두 마음을 품고 그 유혹에 넘어가게
될 때 우리는 또다시 풍랑에 시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천사는 버렸기에 가볍고 그래서 날 수 있습니다.
사탄은 버리지 않았기에 그의 무게 때문에 하늘에서 추락했고 오를 수 없는 자신의 욕심과
교만 때문에 그의 동조자들을 모으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안에는 물 위를 걷는 베드로와 물에 빠진 베드로가 동시에 존재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볼 때 나를 시달리게 했던 물에 빠지지 않고 위를 걸을 수 있지만,
주님을 바라보지 않을 때 우리는 물에 빠지게 됩니다.
많은 걱정 속에 실상 필요한 것 한 가지를 놓치게 되죠.
물 위를 걸을 때도 조심해야 합니다.
처음의 순수한 마음을 잃으면 즉 영적인 교만에 빠지면 그 역시 나를 물에 빠뜨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물에 빠지는 줄도 모르고 빠지게 만들죠.
오직 주님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유사한 목소리들이 “나다”라고 외치면서 주님인 행세를 하고 있지만,
가짜들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속지 않으려면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들어야 할 것입니다.
어두운 밤길에서 누군가 쫓아올 때 두려움에 걷다가도 나의 사랑하는 가족이 “나야”라고
할 때 안심하듯, 주님의 목소리가 반갑게 친근하게 다가올 수 있도록 자꾸 들어야 합니다.
말씀 속에서!
오늘은 입추입니다. 이제 자연은 조금씩 조금씩 자신을 내어줄 것입니다.
도무지 내어주지 않고서는 자랄 수 없음을 자연은 가르치죠. 오늘 입추에 이 말씀을 듣는
것도 축복입니다.
나를 떠나 “오너라”하는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나를 버리고 주님께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야 합니다. 쉽지 않습니다.
다른 이들이 주님의 길을 충실히 따르며 사랑의 길을 걸어갈 때(마더 데레사처럼 이웃을
위한 봉사의 삶을 볼 때) 아름다워 보이나, 내가 그 길을 걸을 때면 오늘 제자들의 경우
처럼 내겐 역풍으로 다가올 때가 많죠. 잘하고 싶은데 내가 가는 길을 힘겹게 하는 요소
들이 자주 나의 길을 막아섭니다.
그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래도 혹시 그렇게 걷다가 내 나약함으로 물에 빠져들 때, 그렇다고 물에 그냥 빠져들거나,
왜 빠지지 않게 하시지 않았느냐고 투덜대면서 호숫가로 가서 삐져있지 말고 “살려 달라”
(마태 14, 30)고 외쳐야 합니다. 그게 신앙입니다.
주님께서는 안타까우나 기꺼운 마음으로 손을 내밀어 주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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