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보니파시오 (St. Boniface) 주교, 순교자
성인의 활동지역 : 크레디톤(Crediton)
성인의 활동연도 : 675?-754년
성인과 같은이름 : 보니파시우스, 보니파키오, 보니파키우스, 보니파티오, 보니파티우스,
보니페이스
보니파시오는 라틴어로 "선행 실천"이란 뜻이다.
독일의 사도로 알려진 보니파시오는 독일 민족의 회개를 위하여 자신의 일생을
바친-원장으로 선출된 영광도 포기한-영국 베네딕토회의 수사이다.
그에게는 두 가지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의 그리스도교적 정통성과
로마 교황에 대한 충성이 그것이다.
이러한 정통성과 충성이 얼마나 필요했는지는 그가 교황 그레고리오 2세의 요청에
따라 719년에 첫 전교 여행을 하면서 본 상황에서 입증되었다.
그곳은 이교도적 생활 방식이 지배적이었다.
그가 그곳에서 본 그리스도교는 완전히 이교로 타락한 것이었으며 오류와 뒤섞인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주로 성직자들에게 그 책임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데다가 정신이 해이했기 때문이며,
때로는 그들이 주교에게 순명하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어떤 경우에는 그들의 신품 자체까지도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이것이 보니파시오가 722년에 처음으로 로마에 돌아와서 보고한 그곳의 상황이었다.
교황은 그에게 독일 교회를 개혁하도록 지시했다.
이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그는 그 지역의 주교가 되어야 했다.
교황은 교회와 세속 지도자들에게도 충고의 편지를 보냈다.
보니파시오는 후에 자신의 사명이 칼 마르텔의 안전 통행권 없이는 인간적인 관점에서
성공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인정했다.
그는 결국 그 지방의 주교가 되었고 독일의 모든 교회를 재편성 할 허락을 얻었다.
그리하여 그는 훌륭한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프랑크 왕국에서 그는 주교의 선거에 평신도가 개입하고 성직자가 세속화되고
교황의 통제력이 결여되는 등 큰 어려움에 부딪혔다.
프리지아에서 마지막 선교중에, 그와 그이 동료 53명은 개종자들의 견진을 준비시키고
있던 중에 살해되었다.
독일 교회가 다시 로마에 충성하도록 하고, 이방인들을 회개시키기 위하여
그는 두 가지 원칙을 따랐다.
첫째 원칙은 로마의 교황과 일치를 이루고 있는 주교에 대한 성직자들의 순명 정신을
회복하는 것이고,
둘째 원칙은 베네딕토 수도회의 형식을 따른 기도의 집을 많이 세우는 것이었다.
수많은 앵글로색슨계의 수사와 수녀들이 그를 따라 대륙으로 건너갔다.
그는 베네딕토회 수녀들을 활동적인 교육 사업에 끌어들였다.
보니파시오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것이라는 그리스도교
율법을 잘 지켰다.
보니파시오에게 그것은 육체적 고통이나 죽음만이 아니라 교회의 개혁을 위한
고통스럽고 그를 당혹스럽게 하는 일이었다.
선교의 영광은 새로운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데려오는 데 있다고 흔히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다스리고 치유하는 것은 보다 덜 영광스러운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보니파시오는 이교의 미신을 파괴하려는 시도에서 그리스도교에 글자 그대로 돌풍을
일으켰다.
미리 예고한 날 모여든 군중 앞에서 그는 구텔베르크 산에 있는 도나르의 신성한
참나무를 도끼로 찍었다.
거대한 나무는 네 조각으로 갈라지면서 무너졌다.
사람들은 신들이 보니파시오에게 저주를 내리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신이 무력하고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그 나무의 판자들을 성당 짓는 데 사용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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