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노르베르토(St. Norbert) 설립자 , 주교
성인의 활동지역 : 마그데부르크(Magdeburg)
성인의 활동연도 : 1080-1134년
성인과 같은이름 : 노르베르또, 노르베르뚜스, 노르베르투스, 노르베르트, 놀베르토,
놀베르트, 볼베르투스
사람들이 프란치스코회(O.F.M)를 농담으로 '돈에 빠진 사람' (Out For Money)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프레몽스트라텐시안 (Premons tratensions) 수도회를 '괴물같은 허세'
(Monstrous Pretensions)라는 말로 익살스럽게 표현한다.
그 이름은 사실 노르베르토가 12세기에 수도원을 세운 장소인 프랑스의 프레몽트레에서
나온 것이다.
그 별명을 다시 생각해 보더라도 노르베르토가 수도원을 세운 것은 사실 괴물 같은
일이었다.
그것은 특별히 성체 성사에 대해 맹렬히 비난하는 이단과 맞서 싸우며 무관심과
방탕 속에 자라 온 많은 신자들에게 다시 활력을 주고 이단들과도 화해와 평화를
이룬 것이다.
노르베르토는 그 많은 일을 성취하는 데 있어서 자기 자신의 능력에 대해 아무런
허세도 부리지 않았다.
그의 수도원에 들어온 수많은 착한 사람들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느님의
힘이 없으면 아무것도 효과적으로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성체 성사에 대한 신심에서 특별히 이러한 도움을 발견하며 그와 그의 동료들은
이단자들을 회개시키고 수많은 원수들을 화해시키며 무관심한 신자들에게 신앙을
일깨워 주는 데 성공하게 해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노르베르토는 마지못해 반은 이방인이고 반은 그리스도인인 남독일에 있는
막드부르크의 대주교가 되었다.
그는 이 직위에서 1134년 6월 6일 그가 죽을 때까지 교회를 위해 용감하고도
열성적으로 그의 사업을 계속해 나갔다. 1582년에 성인품에 올랐다.
특별한 세상은 무관심한 사람들이 건설할 수 없다.
이 같은 사실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애석하게도 지금까지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그렇게도 헌신적으로 그리고 희망에 넘쳐서 내다보았던
다양한 교회를 이루어 놓지 못했다.
과거와 현재에 이르는 이러한 실패의 주된 이유는 대다수의 이름뿐인 신자들의
무관심 때문이며, 교회의 권위나 본질적인 신앙의 교리에 대해서도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노르베르토가 실천한 것처럼 교회에 대한 성실한 충성과 성체 성사에 대한 뜨거운
헌신은 하느님의 백성을 그리스도의 마음과 일치시켜 놓는 데 있어 측량할 수
없는 힘을 지닐 것이다.
사제 서품을 집전할 때 노르베르토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오 사제여! 당신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당신 자신이 아닙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의 종이고 봉사자이시기 때문에 당신 자신이 아닙니다.
당신은 교회의 배우자이시기 때문에 당신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이시기 때문에 당신 자신이 아닙니다.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당신 자신으로부터 나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십니까?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입니다.
오, 사제여! 적어도 십자가 위에 있는 그리스도를 보고 한 말은 당신을 향해서도
되풀이된다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그는 남은 살리면서도 자신은 구하지 못하는구나.'"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1115년경 황제 헨리 5세의 궁전에는 노르베르토라는 부제가 있었다.
본래 가문이 귀족으로서 수입도 상당히 많았으나 생활 상태는 지위에 맞지 않은
방탕한 생활로 좋지 못한 점이 있었다.
어느 날 부하 한 명을 데리고 말을 타고 어떤 예식을 구경하러 가던 도중 뜻밖에
큰 폭풍우을 만났다.
그때 갑자기 부하가 소리쳤다.
"이제 돌아가십시오. 하느님의 벌이 당신 위에 떨어집니다."
그 순간, 엄청나게 큰 번개가 비치면서 땅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천둥이 치자마자
노르베르토는 말과 더불어 땅에 떨어져 의식을 잃고 말았다.
얼마 후 간신히 의식을 회복하게 된 그는 일어나자마자 성 바오로와 같이 "주여,
당신은 저로 하여금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부르짖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알아보려고 지그부륵의 한 수도원에 들어가 기도와 단식으로
날을 보내며 원장과 더불어 마음의 수양에 진력했다.
그 후 그는 쾰른에 가서 사제 서품 준비를 하고 2년 후 훌륭한 자격을 갖추어
서품받았다.
고항에 다시 돌아온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신앙이 극히 두터워져 갖은 고행을
하며 종종 설교도 하면서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교적 생활을 하도록 권고했다.
그러나 그는 가는 곳마다 반대에 부딪쳤다.
특별히 옛 생활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때로는 얼굴에 침 뱉음을
받기까지 했다.
그래도 그는 이전의 죄의 보속으로 여기고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무엇이나
눈을 감고 끝까지 인내하며 다 받았다. 그는 이곳 저곳 마을을 찾아다니며 설교했다.
가는 곳마다 박해와 냉대를 받았고 나중에는 교황 사절에게 고소까지 당했다.
노르베르트는 이에 대해 겸손되이 변명했다. 그리고 자기 소유물을 팔아,
얻은 돈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신분이나 지위를 모두 버리고 마침
교황 젤라시오 2세가 체류 중인 프랑스 남쪽에 있는 프로방스에 갔었는데,
이미 노르베르토의 성스러운 일 상 생활을 잘 알고 있던 교황은 기꺼이 그를
맞이하며 이후 당신 곁에 머물기를 청했다.
그러나 그는 그 호의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교황에게 간청하여 어디서든지 설교할 수 있는 허가를 얻어 우선 쾰른에
가게 되었다. 맨발로 눈 속을 걷고 야채를 먹는 것에 만족하며 가끔 밤을 새워 가며
기도했다.
프랑스의 바란시안누에 도달했을 때 민중의 간청에 못 이겨 일장의 설교를 하게
되었다. 그는 불어를 조금 밖에 알지 못했지만 청중은 모든것에 대해 그가 말하려
하는 점을 깨닫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이것은 마치 예루살렘에서의 성령 강림 날에 사도들 위에 일어난 것과 같은 감탄할
만한 성령의 특별한 은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설교하고 싶었으나 동행했던 3사람의 동료가 죽었기
때문에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때 젊은 성직자가 그에게 와서 동행하기를 간청해 노르베르토는 그 사람과
같이 간부레의 주교 불갈도를 방문하고 부근 일대에서 자유로이 설교할 수 있는
허가를 얻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활동에 풍부한 축복을 내려 주셔서 그 성과가 아주 컸다.
그러므로 라온의 주교 발델미이는 교황의 추천에 따라 대우를 극진히 하며 그를
자기교구에 초빙했다.
노르베르토는 그 청을 받아들여 주교로부터 프레몽트레의 계곡에 있는 소성당을
받았다.
그는 예전부터 기도와 고신극기를 할 수 있는 수도원 창립을 구상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 프레몽트레에서 한 무리의 백의의 수도자들이 손에 십자가의 횃불을
들고 행렬하는 꿈을 꾸었다.
1120년 1월 25일, 그가 갈망하던 프레몽트레 수도회가 창립되어 주교는 그에게
흰옷을 주었는데 이것은 그 후 오랫동안 그 회의 수도복이 되었다.
그는 즉시 부근 일대를 다니면서 설교했다. 이에 감동된 사람들이 입회해 곧
35명의 수련자를 받게 되었다. 이들은 모두 사제품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노르베르토는 그들에게 수도회의 정신을 가르쳤다.
특별히 모든 성체 성사에 관계되는 사물, 즉 미사 성제와 기타 모든 공경 예식에
대한 존경과 신심을 드러내는 것을 사명으로 했다.
교회의 용무를 띠고 독일의 슈파이에르에 갔을 때의 일이다.
그는 황제와 교황 사절의 간청에 못 이겨 드디어 막드부르크의 대주교가 될 것을
승낙했다.
그 교구에는 개혁할 일, 정리할 일이 태산 같았다.
그가 임지에 갔을 때에 대주교관의 문지기는 그이 너무나도 남루한 의복을 보고
거지로 잘못 생각해 그를 주교관에 들여보내지를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새로운 대주교에게 반감을 갖고 있는 이들은 매사에 방해하며
심지어는 그를 없애버리려고 까지 했다.
실제로 악한이 칼을 들고 덤볐을 때 다행히 그 위기를 모면하고 아무 상처도 받지
않았다는 것은 깆거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대주교의 덕행과 온화하고도 용맹한 마음은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1132년 노르페르토는 황제의 대관식에 참석하고자 로마에 갔을 때 뜻밖에 중병에
걸려 4개월간 병상에 눕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후 간신히 막드부르크에 돌아와 2년간이나 더 직무를 보다가 마침내
1134년 6월 6일, 54세로 선종했고, 1582년에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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