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7주간 목요일>(2009. 7. 30. 목)
<묵시록을 읽는 두 가지 방법>
요한 묵시록은 종말과 최후의 심판에 대한 예언서입니다.
묵시록을 읽을 때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1. 최후의 심판과 온갖 재앙의 묘사에 주목하면서
그 일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를 실감나게 묵상하고,
그 무서운 심판을 면하려면 서둘러서 회개를 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을 갖는 것.
2. 하느님의 정의로운 심판을 묵상하고,
동시에 하늘 나라와 새 하늘 새 땅이 얼마나 좋은 곳인지를 묵상하고,
그곳에 갈 날을 기다리면서 오늘의 고통을 극복하는 힘과 용기를 얻는 것.
지금 죄 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최후의 심판은 무서운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묵시록을 결코 편한 마음으로 읽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도 회개하려고 꾸준히 노력하고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하느님께서 죄인들을 가차없이 처벌하시는 모습이 후련하게 느껴질 것이고,
묵시록이 희망과 용기를 주는 책이 될 것입니다.
같은 책이지만, 사람에 따라서 전혀 다른 책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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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30일의 복음 말씀에 최후의 심판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최후의 심판 날은 죄인들이 멸망하는 날이지만,
의인들은 구원을 받는 날입니다.
죄인들에게는 초상날이 되겠지만,
의인들에게는 잔칫날이 될 것입니다.
죄인들은 무서워서 겁에 질리는 날이 되겠지만,
의인들은 기쁨과 행복에 가득 차는 날이 될 것입니다.
각자 자기 자신에게 달린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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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공부라는 것을 건성으로 했습니다.
그러다 신학교에 들어간 뒤에는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공부를 했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긴 했는데, 그래도 시험은 부담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친구 하나는 말하기를,
'시험이라는 것만 없다면 신학교가 정말 천국 같을 텐데..' 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늘 부담스러운 시험이었지만, 그래도 저는 시험이 좋았습니다.
시험 기간의 분위기도 좋았고,
시험이 끝난 뒤의 홀가분한 느낌도 좋았습니다.
후회없이 공부하고, 후회없이 답안지를 쓰고...
저의 지도교수 신부님은 늘 격려하시기를,
"시험이란 실력을 발휘할 절호의 기회다. 그러니 즐겁게 임해라."
그랬습니다. 시험 치는 일 자체가 재미 있었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신학교에서의 시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건 준비가 잘 되었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저희 학년 전원 다 재시험에 걸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가 제가 유일하게 신학생 시절에 시험 준비도 제대로 안 했고,
시험을 잘 못본 때입니다.
저만 그런 줄 알았는데, 전원 다 그랬던 것입니다.
지금도 그 시험 문제를 기억합니다.
구약 성경 예언서 과목이었는데, 시험 문제는 이것이었습니다.
"이사야서 7장에 나오는 임마누엘 예언의 역사적 배경을 써라."
왜 다들 그 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하고, 전원 다 재시험에 걸렸을까??
전부 다 구약성경의 방대한 예언서들을 읽지 않고
그냥 수업 시간에 적은 노트만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교수 신부님의 방침은 분명했습니다.
"수업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경 자체를 읽는 것이 더 중요하다."
며칠 뒤에 재시험 문제는...
12 소예언서에서 한 구절씩 뽑아서 제시한 다음에
그 구절이 어느 예언서에 나오는지를 쓰라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진땀 나는 시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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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성경의 '코헬렛'(전도서)의 가르침을 생각합니다.
그 책을 읽어보면 청춘을 즐기고 인생을 즐기라는 권고가 나옵니다.
살고 싶은 대로 살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권고도 나옵니다.
그러나 단서가 붙어 있습니다.
하느님의 심판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인생을 즐기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즐기는 것 자체가 나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삶에 대해서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
저는 신학생 시절에 신학책보다는 소설을 더 많이 읽었던 것 같습니다.
신학교 도서관에 있던 소설과 시집은 다 읽은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다음에는 시를 썼고, 소설을 썼고, 희곡을 썼습니다.
제가 쓴 희곡을 무대에 올려서 공연도 했습니다.
신학교 생활을 그런 식으로 즐겼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시험 기간이 다가오면 남들보다 더 바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들 공부할 때 소설을 읽었으니,
남들 잘 때 공부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공평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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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젊은 나이에 봉쇄 수도원에 들어가서 평생 수도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왜 그렇게 사는지 모르겠다. 무슨 재미로 사나...
무슨 인생이 그 모양이냐...
저도 봉쇄 수도원의 생활은 잘 모릅니다.
그러나 며칠 함께 살면서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 수도자들이 얼마나 행복하게 살고 있는지를...
그곳이 곧 천국이었습니다.
저는 이 나이 먹도록 그분들처럼 행복한 모습은 다른 곳에서는 보지 못했습니다.
인생을 즐긴다는 것도 사람 나름입니다.
즐기는 방식이 모두에게 똑같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술과 마약과 섹스로 즐기는 사람도 있고,
봉쇄 수도원의 수도자들처럼 기도와 노동과 침묵으로 즐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는 모습이 극과 극인데...
최후의 심판을 생각한다면,
마지막 진짜 최후의 행복이 누구의 것이 될지는 분명하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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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심판은 누구에게나 무서운 일입니다.
그러나 준비만 잘 하면 무서운 일이 아니라 행복한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시험 준비를 잘 한 학생은 시험을 기다립니다.
시험 공부를 하지 않은 학생은 시험이 연기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학생들은 대부분 시험이 연기되어도 여전히 공부를 안 하더군요.)
종말, 최후의 심판이 언제 있게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개인의 종말은 누구에게나 곧 닥친다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인의 평균 수명을 생각한다면,
사고나 병을 겪지 않고 자연사 한다고 해도
저의 수명은 삼십년도 안 남았습니다. 이십 몇년 남았나?
지나버린 세월을 생각해보면 남은 시간은 참 별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공평합니다.
오래 살겠다고 발버둥쳐봐야 다 거기서 거기라는 점에서 공평합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마음과 시험을 준비하는 마음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시험이 누구에게나 부담스럽듯이 죽음은 누구에게나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준비만 잘 되어 있다면... 시험도 죽음도 편안하게 맞이할 수 있습니다.
종말과 최후의 심판은 그 다음의 문제일 뿐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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