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ily/† 오늘의 강론

원수를 사랑하여라

ohjulia 2012. 9. 13. 14:42






    <연중 제23주간 목요일>(2012. 9. 13. 목)(루카 6,27-38)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원수를 사랑하여라.>

     

    예수님께서는 모든 계명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계명은

    '하느님을 사랑하라.'와

    '이웃을 사랑하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르 12,28-34).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하느님만을 사랑하고,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들은 물리쳐라.'입니다.

    이것은 구약성경의 기본 사상이기 때문에

    이것에 대해서는 유대인들도 이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라.' 라는 계명에 대해서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유대인들의 생각이 다릅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한 '이웃'은 하느님을 함께 믿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원수'는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웃'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지 않은 '모든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는 사람 가운데에서는 '원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에게 원수가 하나 있다면 그것은 '사탄'입니다(마태 13,28).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고 하신 말씀은

    사탄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절대로 아니고,

    '너희가 원수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실은 이웃이기 때문에 사랑해야 한다.' 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은

    '이웃을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에 포함되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제시된 계명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의 아버지이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러 오신 분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들에게는

    이웃과 원수를 구분하는 일 자체가 무의미합니다.

     

    처음에 적십자사가 창립될 때의 정신은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지 않고 부상자를 모두 치료하는 것이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런 정신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10,29-37)에 나오는 사마리아인의 선행이

    원수를 사랑한 일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서로 원수지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강도당한 사람을 도와주는 인물을

    사마리아인으로 설정하신 것은 의도적인 일입니다.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도와주는 일에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그 이야기에는 이웃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과

    그 이웃의 고통을 외면한 사람들과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도와준 이웃이 등장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이웃입니다. 원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강도당한 사람은 하느님께 간절하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지나가다가 저를 도와주게 하십시오." 라고.

     

    그 사람이 '사마리아인 말고 유대인이 저를 도와주게 하십시오.'

    라고 기도했을 가능성이 있을까?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 기도할 사람은 없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이 실천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도 모르게 마음속에서 이웃과 원수를 구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원수란 없습니다.

    모두가 다 이웃입니다.

     

    한 가지 더, '사랑'이라는 말에 대해서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은 좋아하는 것과 다르고,

    무조건 잘해주는 것만을 뜻하는 것도 아니고,

    뭔가를 베푸는 것만을 뜻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의 원문 단어는 '아가페'입니다.

    '아가페'는 보통 하느님의 사랑을 뜻하는데,

    하느님의 선(善)이 실현되는 것을 뜻하기도 하고,

    하느님의 구원 의지가 실현되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원수에게 '아가페'를('사랑'을) 베풀어주는 것은

    그들을 회개시켜서 그들과 함께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기 위해서입니다.

     

    9월 13일의 복음 말씀 중간에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루카 6,31)." 라는 황금률이 나오는데,

    신앙인의 궁극적인 희망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웃도 함께 하느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최고의 사랑 실천이 됩니다.

     

    잘해주는 방식으로 회개시킬 수 있다면 잘해주고,

    꾸짖어서 회개시킬 수 있다면 꾸짖고,

    타일러서 회개시킬 수 있다면 타일러야 합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루카 17,4)."

    (사랑하는 자녀가 정말로 잘되기를 바라면서 꾸짖는 그런 부모의 심정으로.)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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