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ily/† 오늘의 강론

사랑

ohjulia 2012. 12. 27. 09:00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2012. 12. 27. 목)(요한 20,2-8)

    <사랑>

    요한복음에 자주 나오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 라는 말은

    요한 사도를 가리키는(요한 사도가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해석됩니다.

    그런데 이 표현을 '예수님께서 다른 제자들보다 요한을 더 사랑하셨다.'

    라는 뜻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다른 제자들(신자들)보다 요한을 더 사랑하셨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요한을 편애하신 것이 되는데,

    과연 예수님께서 그렇게 특정 제자를 편애하셨을까?

    우리는 예수님을 그런 분으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신 분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 라는 표현은

    '다른 사람이 예수님을 사랑한 것보다 더 예수님을 사랑한 제자'

    라는 뜻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제자를 똑같이 사랑하셨는데,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사랑은

    사람마다 좀 차이가 있었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배반자 유다는 예수님을 별로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고.)

    요한 사도는 다른 누구보다도 더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자기가 예수님의 사랑을 남들보다 더 많이 받았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배반자 유다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가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을 것이고,

    자기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5)."

    하늘의 태양은 온 세상 사람을 똑같이 비추는데

    어떤 사람은 햇빛을 온 몸으로 가득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은 그늘 속에 들어가 있고,

    어떤 사람은 해를 등지고 돌아서서 자기 그림자만 봅니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질문할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똑같이 사랑하셨다면,

    왜 중요한 일이 있을 때에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 데리고 가셨는가?"

    그것은 사랑의 차이가 아니라 직무의 차이일 것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이런 질문을 할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어머니를 요한에게만 부탁하셨는가?"

    그것은 아마도 여러 가지 여건을 고려할 때

    요한이 어머니를 모시기에 가장 적당한 제자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초대 교회가 받았던 박해 상황을 생각하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요한 사도만 박해를 안 받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또 어떤 이들은 요한복음 11장 5절,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그 여동생과 라자로를 사랑하셨다."

    라는 구절을 예로 들면서

    예수님께서 특정인을 편애하셨다고 주장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구절 역시 편애의 증거는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타 남매와 친하게 지내시고 그들을 사랑하셨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을 덜 사랑할 정도로 그들을 더 사랑하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뒤에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 나타나셨는데,

    그 일도 역시

    마리아 막달레나를 다른 사람들보다 더 사랑하셔서 그런 것이 아니라,

    마리아 막달레나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남들보다 먼저 예수님을 만나고 알아본 것으로 해석합니다.

    살면서 어떤 고난을 겪게 되면

    '하느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으시는가 보다.' 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고,

    다른 사람과 자기의 처지를 비교하면서

    '하느님은 나보다 저 사람을 더 사랑하시는가 보다.' 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속적으로(물질적으로) 잘되는 것이

    하느님의 사랑을 더 받았다는 표시가 되는 것도 아니고,

    고난과 고통을 겪는 것이 하느님의 사랑을 덜 받는다는 표시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가장 복되신 여인 마리아의 생애는 세속적으로는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고난과 고통이 하느님 사랑의 표시라는 것은 아닙니다.)

    남들보다 고난을 덜 겪어도, 또는 더 겪어도

    하느님의 사랑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8)."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자기가 사랑받고 있음을 더 잘 알게 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6)."

    사랑받고 있으니 사랑해야 합니다.

    "혹시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닌가?" 라는 의심이 든다면,

    자기 자신은 하느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먼저 반성해야 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