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고린 1, 17-25.
마태 25, 1-13.
오늘의 말씀은 준비하는 사람과 준비하지 못한 사람을 비교함으로써
준비하지 못한 이의 비참함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처녀들의 모습은 별반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신랑을 기다리는 이들의 모습은 화목해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랑이 오는 시간이 늦어지게 되고, 이들은 졸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내 밤중이 되자 잠을 자게 됩니다.
잠을 자고자 해서 자게 되는 것이 아니라 늦어진 시간 때문에 저절로
잠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잠이 들게 된 어리석은 처녀들뿐만 아니라 슬기로운
처녀들 역시 그 자체만으로 잘못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들의 차이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시피 어리석은 처녀들이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밤중이 되자 신랑이 왔다는 외침이 들려오고, 처녀들은 등을 챙깁니다.
기름을 충분히 준비한 처녀들은 꺼져가는 등불에 기름을 채웁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처녀들은 기름이 다 떨어졌음을 알고 낭패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청하지만, 그들은 응해주지 않습니다.
잔치에 들어가느냐 들어가지 못하느냐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자신들의
몫을 충분히 챙긴 그들이 그 몫을 나누어 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나누면 그들의 것도 모자라게 된다. 9절) 이것은 지금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고 선업을 나누지만, 주님을 맞이하게 되는 그때에는 그 누구도
자신의 나눌 수도 받을 수도 없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즉 지금 나의 삶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죠.
복음을 보면 슬기로운 처녀들은 어리석은 처녀들에게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고 말합니다.
결혼식이 거행될 시간이 거의 다 되었을 때 마을에서 기름을 사오기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살펴보면 기름을 사는 데에 성공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어리석은 처녀들이 그 전에 즉 평소에 기름을
사서 준비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미련하다’는 것은 ‘둔하다’라는 것입니다. ‘슬기롭다’는 것은 내다볼
줄 알고 통찰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삶을 살면서 너무나 무뎌져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들으려 하지 않고,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미련한 것입니다.
그 미련함은 지금의 삶에서는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냥 그렇게 살아도 웃으면서 지낼 수 있고, 슬기로운 처녀들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에 늘 민감하며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사는 이들과의 차이는 그분과 대면하는 때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어리석은 모습으로 둔하게 살아간다면, “‘주님, 주님’ 저희도
기다렸습니다.”라고 아무리 외쳐도.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마태 25, 12)라는 단호한 주님의 목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주님, 제가 당신의 말씀에 예민하게 하소서.
그냥 흘러가는 시간에 기다림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온 힘을 다하여 준비하며
기다리게 하소서.
아멘.
**신부님 강론 말씀의 제목은 제 임의로 한 것입니다.
♬ 그 진실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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